【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국내 정원박람회 문턱을 넘지 못했던 한국 정원이 영국 무대에서 수상을 이뤄냈다. 한옥과 해송, 돌담, 기와 등 한국적 요소를 담은 정원은 성과와 함께 해외에서 ‘한국 정원’의 독자적 정체성을 어떻게 알릴 것인지에 대한 과제도 남겼다.
15일 천리포수목원 식물부 기록연구팀 소속 강희혁 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적 소재와 해안 정원의 장소성을 담은 ‘바다의 축복’ 정원이 지난 5월 영국 RHS(영국 왕립원예협회, Royal Horticultural Society) 말번 스프링 쇼에서 실버메달과 최우수 시공상을 받았다.
이번 정원은 강 연구원과 수목원 전문가 교육과정 연수생 2명이 함께 준비한 프로젝트다. 이들은 당초 국내 정원박람회 출품을 목표로 했지만 지난해 3월부터 6월까지 여러 국내 대회에 지원했으나 선정되지 못했다. 이후 해외 무대로 방향을 틀었고 같은 해 7월부터 RHS 말번 쇼 출품 준비에 들어갔다.
강 연구원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주최한 ‘2026 산림정원 아카데미: 백두대간에서 만나는 숲과 정원 현장연수’에서 ‘RHS 한국정원 조성을 통해 바라보는 우리나라 정원문화 산업의 방향성’을 주제로 발표했다. 이번 연수에는 약 15명의 기자가 참여했다.
RHS 말번 쇼는 첼시 플라워쇼, 햄프턴 코트 플라워쇼 등과 함께 RHS가 운영하는 주요 정원 쇼 가운데 하나다. 매년 가장 이른 시기에 열리는 RHS 쇼로, 신진 정원 작가들의 등용문 성격을 지닌 무대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8월 말 설계안을 제출한 팀은 심사와 현지 답사를 거쳐 올해 4월 13일부터 5월 5일까지 영국에서 정원을 조성했다. 해당 정원은 지난 5월 7일 개막한 RHS 말번 스프링 쇼에서 전시된 뒤 철거·이전됐다.
출품 정원의 모티브는 천리포수목원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수목원의 풍경과 한옥, 해송, 돌담, 독살 등 한국 해안의 장소성을 정원 안에 담았다. 건축 현장에서 쓰인 안전모를 재활용해 기와 형태로 제작하고 한지와 자개 문양도 활용했다. 전통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한국적 소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정원 디자인의 바탕에는 천리포수목원 설립자인 고(故) 칼 페리스 밀러의 철학도 반영됐다. 미국에서 태어나 스스로를 ‘푸른 눈의 한국인’이라 불렀던 그는 척박한 해안 지대를 수목원으로 일궈낸 인물이다. 이번 정원은 바닷바람과 염분, 모래땅이라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생명이 자랄 수 있다는 천리포수목원의 장소성을 정원 언어로 풀어냈다.
식재(나무나 풀, 꽃 등 식물을 심어 배치하는 일) 역시 해안성을 중심에 뒀다. 사구 식물과 해안에 분포하는 식물을 활용해 바닷가 정원의 분위기를 구현했다. 정원 안에는 해송을 상징하는 소나무와 한옥 구조물, 돌담, 물길 등이 배치됐다.
성과는 분명했다. 해당 정원은 RHS 말번 쇼에서 실버메달을 수상했고 구조물과 시공 완성도를 인정받아 최우수 시공상도 함께 받았다. 심사에서는 당초 제출한 설계안이 실제 정원에서 얼마나 충실하게 구현됐는지, 식물과 구조물이 안정적으로 조성됐는지 등이 주요하게 평가됐다.
다만 이번 도전은 한국 정원문화의 과제도 남겼다. 영국의 현지 관람객들은 한옥과 기와, 자개 등 한국적 요소를 담은 정원을 보고도 종종 일본 정원으로 받아들였다. 강 연구원은 “한국 정원이라는 안내판을 보기 전까지는 일본 정원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한국 정원이 해외에서 독자적으로 읽히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출품과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번 정원 조성에는 한화로 약 1억6000만원이 투입됐다. 일부 후원금과 RHS 조성금이 있었지만 상당 부분은 출품자들이 직접 부담했다. 해외 정원 쇼에 나가기 위해서는 설계 역량뿐 아니라 후원, 식물 수급, 운송, 현지 시공 등 산업적 기반이 함께 필요하다는 점도 확인된 셈이다.
영국 정원 쇼의 운영 방식도 한국과 달랐다. 정원은 4일간 전시된 뒤 해체돼 다른 수목원으로 이전된다. 출품 단계에서부터 정원이 전시 이후 어디에 남을지까지 계획해야 한다. 식물 역시 병해충 유입을 막기 위해 출처와 이력이 확인돼야 했다. 이 과정을 위해 해외 정원사들을 위한 별도의 교육도 마련돼 있다. 영국에서는 정원 조성부터 전시, 이전, 판매, 교육까지 하나의 산업 구조로 연결돼 있는 셈이다.
강 연구원은 “한국 정원도 계속 작품을 내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한 번의 출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정원이 무엇인지 그 정체성을 분명히 보여주는 작업이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Copyright ⓒ 투데이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