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가 장기화되고 있다. 시민들은 “좌우 이념이 아닌 국민 권리”를 외치며 삼삼오오 모였지만 어느새 주도권은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세력에게 넘어갔다. 선거관리위원회를 향하던 분노가 제각기 다른 곳으로 뻗어나가면서 ‘무차별 혐오 시위’로 둔갑했다. 전례 없는 사태인 만큼 제대로 고름을 짜내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커다란 흉으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엄습하고 있다.
지난 5일 서울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인근은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이들로 빼곡했다. 몰려든 인파를 통제하기 위해 안전요원을 자처하는 봉사자가 군데군데 서 있었고 ‘생수·보조배터리 무료 나눔’ ‘안전 우선’ ‘재선거 이외 정치적 구호 금지’라는 팻말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아수라장
25도를 웃도는 쾌청한 날씨에 유아차를 끌고 오거나 반려견과 함께 현장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전통적인 시위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지난 7일 저녁을 기점으로 시위의 성격이 묘하게 달라졌다. 그전까지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책임 규명과 재선거 요구가 주를 이뤘지만, 극우 유튜버와 지지자가 합류하면서 시위의 구심점이 ‘부정선거’가 된 것이다. “재선거”이던 시위 구호 역시 “부정선거 재선거”로 바뀌었다.
시위는 갈수록 격해졌다. “재선거만 외쳐야 한다”는 참가자들을 극좌 성향의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이라고 지목하며 실랑이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폭행 신고가 접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 시위 참여자 입에서는 지나가는 경찰을 붙잡고 “시진핑 개XX 해봐” “너 공안이야?”라며 사상 검증을 빙자한 혐오 발언도 서슴없이 나왔다.
지난 8일 태극마크 선수복을 입은 핸드볼 여성 유소년 국가대표팀 선수가 “문을 열어달라”며 시위 참가자들에게 간청하는 일도 있었다. 시위 참가자들은 “핸드볼 선수인지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얼굴 대조를 위해 경기 영상을 보여달라”며 막아섰고 카메라를 든 유튜버들이 몰려들자 선수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벽으로 몸을 돌렸다.
선수들이 공이 담긴 수레와 비닐백 등 훈련용품을 갖고 나오자 이번에는 “소지품 검사를 해야 한다”며 그들을 에워쌌다. 한 남성이 “양말도 벗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해 경찰의 경고를 받는 일도 있었다.
신율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정파를 떠나 공정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던 세력이 빠지고 부정선거 세력이 참여하면서 흐름이 바뀐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보수와 음모론자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 부정선거를 외치는 순간 문제는 심각해진다”며 “선거 과정의 미흡한 과정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부정선거에 묻혀 여론의 호응을 얻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아스팔트 극우’ 선 긋기 시도했지만…
기어코 숟가락 얹고 물까지 흐렸다
이번 사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나이, 성별, 이념에 따른 정치 양극화가 더욱 심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정치권에서조차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는 사이 시위는 혐오로 점철됐고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정쟁의 먹잇감으로 던져졌다.
권현서 경제사회연구원 미래센터장은 <일요시사>를 통해 “시위의 본질을 흐리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작은 선관위에 대한 불신이었지만 잠실에 모인 사람들이 본인의 의견만 주장하다 보니 혼란한 상황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권 센터장은 “부정선거를 의심하던 사람들이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확신을 갖고 현장에 참여하고 있다. 그동안 쌓인 불만이 마침내 표출된 것”이라고 말했다.
시위의 본질은 선관위의 미흡한 대처로 인한 혼란인 만큼 선관위 개혁이 1순위로 지목된다.
권 센터장은 “그동안 정부나 기관은 꾸준히 제기된 문제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일을 해왔다.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더 나은 선거 문화를 만드는 책임을 보여줘야 했다”며 “사회 전체가 불통의 시위를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새미래민주당 전병헌 대표는 “선관위의 무능이 증명됐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새로운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사전투표 제도를 포함한 쇄신과 정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선관위 해체가 가능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는 “선관위 자체가 쓸모가 없기보다 그 조직이 오랫동안 기득권과 무풍지대에 안주하다 보니 생긴 문제”라며 “선관위라는 이름과 조직을 환골탈태하는 수준으로 바꾸어서 국민에게 확실한 믿음을 주는 게 중요하다. 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의 문제고, 신뢰받지 못하는 국가 기관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 8일 조희대 대법원장은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한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사직 의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론은 여야를 막론하고 “어떤 책임을 어떻게 진다는 것이냐”며 쉽사리 용서하지 않는 분위기다.
선관위 스스로 불러온 재앙…장기화 조짐
“신뢰 잃은 기관은 무쓸모, 해체가 답?”
노태악 위원장 등을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고발한 김순환 서민민생대책위원회 사무총장은 “노 위원장의 임기는 애초 올해 3월까지였다. 위원장직 사퇴로 일이 끝났다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거칠게 비판하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국정조사를 최대한 신속히 추진하는 것에 초점을 뒀으나 일각에서 재선거를 요구하는 움직임도 일었다. 민주당 박선원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선관위의 책임을 물으며 “투표용지로 문제가 된 지역은 재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민희 의원도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전면 재선거’ 주장은 비상식”이라면서도 “투표용지가 문제된 지역만 재선거하자”고 힘을 실었다.
김형남 전 정원오 서울시장 후보 캠프 대변인은 재선거 소청을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전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한 것으로 확인된 일부 투표소만 재투표를 진행하는 선거 소청을 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선거 소청은 선거 효력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한 전 단계로, ‘일부 무효’ 결정이 내려질 경우 무효가 된 일부 투표소에서의 선거는 무효화되며 해당 투표소에서만 재선거를 진행하게 된다.
김 전 대변인은 “선관위 정상화와 개혁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며 “국정조사(이하 국조)를 진행해야 하고 이와 별개로 특검 이야기도 나오는데 특검은 수사 범위가 좁다. 국회에서 빠르게 합의를 해서 특조위를 만드는 게 더 유용하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엇나가는
김 전 대변인은 “시민의 화가 잠실에 응축돼있고, 그 화의 방향이 선관위, 정부, 대통령, 민주당 등 전부 제각각”이라고 봤다. 그는 “이 분노를 제도로 잡아주고 수습하는 게 정당과 정치의 역할”이라며 “당이 선관위를 진상조사하고 바로잡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사태는 투표소에서 발길을 돌린 국민 개개인의 분노가 모인 결과다. 앞으로 있을 모든 선거마다 같은 혼란이 반복된다면 투표에 대한 불신은 물론 헌정 질서까지 무너지게 된다.
대한민국은 또다시 정치 혐오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곪아버린 우리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치유할지, 정치권의 큰 숙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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