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전시현 기자 | 은행산업이 지난해 또 한 차례 사상 최대 실적을 갈아치웠지만 시장은 이를 단순한 호황의 신호로 보지 않는 분위기다. 이는 인공지능(AI)과 스테이블코인이 금융산업에 수용되면서 은행의 전통적 경쟁력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분석이다.
12일 맥킨지가 최근 공개한 '글로벌 뱅킹 애뉴얼 리뷰(Global Banking Annual Review) 2026' 프리뷰에 따르면, 2025년 전 세계 은행권의 순이익은 1조3000억달러로 2024년보다 7% 증가했다. 고금리 환경이 이어지는 가운데 주요 은행들이 견조한 수익성을 유지한 결과다.
하지만 보고서에 따르면, 은행의 유형자기자본이익률(RoTE)은 2024년 12.4%에서 지난해 11.8%로 낮아졌다. 순이익은 늘었지만 보통주 중심 자기자본 대비 수익성은 오히려 후퇴했다. 순이자마진(NIM) 역시 같은 기간 1.65%에서 1.63%로 하락했다.
맥킨지는 이를 두고 기존 은행 수익 모델이 압박받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했다. 사상 최대 이익을 기록하고 있지만 수익 구조의 체력은 낮아졌다는 것이다.
▲ AI가 고객을 데려간다
맥킨지가 이번 보고서에서 가장 주목한 변화는 '에이전틱(Agentic) AI'의 확산이다. 에이전틱 AI는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사용자를 대신해 금융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기술을 뜻한다. 고객 계좌 잔액을 실시간으로 점검하고 금융회사별 금리를 비교한 뒤 더 높은 수익을 제공하는 계좌로 자금을 자동 이동시키는 방식이다.
보고서는 이 같은 기능이 보편화되면 은행이 오랫동안 누려온 예금의 관성이 크게 약화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고객이 직접 금융회사를 비교·선택하던 시대에서 AI가 최적의 상품을 찾아주는 시대로 넘어가면 고객 접점의 주도권도 은행에서 AI 플랫폼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드 사업도 예외가 아니다. 카드 혜택 비교와 포인트 현금화, 잔액 이전 등이 자동화되면 고객과의 관계를 장악하는 주체는 카드사가 아니라 AI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맥킨지는 분석했다.
특히 보고서는 변화의 강도보다 속도를 경계했다. 생성형 AI는 미국 생산연령인구의 45%에게 확산되는 데 불과 2년이 걸렸다. 디지털 뱅킹이 같은 수준의 보급률에 도달하는 데 15년이 걸렸던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다.
맥킨지는 과거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에는 금융권에 적응할 시간이 있었지만 AI 시대에는 사실상 그런 유예 기간이 사라졌다고 평가했다. 기술 도입 여부보다 얼마나 빠르게 조직을 바꿀 수 있느냐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 스테이블코인이 은행의 역할 재정의할 수도
스테이블코인에 대해서도 맥킨지는 단기적인 열풍보다 구조적 변화를 주목했다.
현재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유통 규모는 약 3000억달러 수준이다. 지난해 실제 결제 활동 규모 역시 약 4000억달러로 전 세계 금융 시스템 전체와 비교하면 아직 제한적인 수준이다.
맥킨지는 현재 시장의 관심이 경제적 현실보다 앞서가고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장기적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보고서는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가 2030년 4조달러 수준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특히 자금 보관과 결제 기능이 전통 은행 시스템 밖에서 이뤄지는 비중이 늘어날 경우 은행의 핵심 사업 영역이 직접적인 도전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예금과 송금, 결제는 은행 수익 모델의 근간이다. 스테이블코인이 이 영역을 일부 대체하기 시작하면 은행의 역할 역시 재정의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 핀테크 공세에 은행 영향력 축소
은행을 압박하는 요인은 AI와 스테이블코인만이 아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상위 1000개 핀테크 기업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2021년 10%에서 지난해 17%까지 확대됐다. 네오뱅크와 플랫폼 사업자들이 고객 접점과 금융 유통 채널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맥킨지는 AI가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화하고 스테이블코인이 결제 인프라 변화를 촉진할 경우 전통 은행이 단순한 비용 절감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 보고서는 '멀티 스피드 조직' 구축을 제시했다. 핵심 시스템은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도 신사업은 보다 빠르게 실험하고, 미래 기술은 빠른 속도로 검증하는 '패스트(Fast)·패스터(Faster)·패스티스트(Fastest)'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맥킨지는 기술 변화의 속도가 달라진 만큼 조직 역시 속도에 따라 분화하지 않으면 고객 주도권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 최대 이익에도 안심 못 하는 은행들
은행 산업의 지형 변화도 이미 시작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시가총액 기준 세계 20대 은행 가운데 10곳을 차지했던 글로벌 범용은행은 지난해 4곳으로 줄었다. 대신 특정 대륙과 지역에서 강한 경쟁력을 확보한 이른바 '컨티넨털 은행' 모델이 부상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맥킨지는 기술 혁신이 더 이상 개별 금융상품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은행 모델이 살아남을지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과거에는 규모와 자본력이 경쟁력을 좌우했다면 이제는 고객 접점과 결제 인프라를 누가 장악하느냐가 은행의 미래를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AI가 고객과 금융회사를 연결하는 창구 역할을 맡기 시작했고 스테이블코인은 자금 보관과 결제 기능을 전통 금융권 밖으로 확장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핀테크 기업들까지 유통 채널을 빠르게 넓히면서 은행들이 오랫동안 누려온 사업 영역의 경계도 흐려지고 있는 것이다.
맥킨지는 "앞으로 은행권이 직면할 경쟁 상대가 반드시 다른 은행일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다. AI 플랫폼과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핀테크 기업이 금융산업의 새로운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사상 최대 이익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은행들이 AI와 스테이블코인 대응 전략 마련에 속도를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며, "기술 변화의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면서 고객 접점과 결제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도 본격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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