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년 전 뉴욕 월스트리트에는 늘 검은 드레스를 입고 다녀 '마녀'라 불린 여성이 있었다.
지독한 구두쇠로 악명이 높았지만, 국가적 금융위기 속 뉴욕시를 파산 직전에서 구한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의 여성 사업가이자 전설적인 투자자로, 현재 가치로도 수조 원이 넘는 재산을 가졌던 갑부 '헤티 그린'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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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집안에서 배운 돈의 흐름
헤티 그린은 1834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규모 포경선단과 무역업을 운영하며 큰 부를 쌓은 자산가 가문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문의 사업과 금융 환경에 자연스럽게 노출됐다.
그린은 어린 시절부터 경제 기사와 금융 보고서를 접하며 숫자와 시장의 흐름을 익혔다. 시력이 좋지 않았던 할아버지를 위해 여섯 살 때부터 경제 관련 자료를 소리 내어 읽어 줬고, 이 과정에서 돈의 흐름과 사업 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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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30세가 되기 전에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헤티 그린은 자산을 지키는 데만 만족하지 않았다. 당시 여성의 사회적 활동과 경제적 권리가 매우 제한적이었던 시대 상황 속에서도 그는 독자적인 투자 행보를 이어갔다.
자산가 에드워드 헨리 그린과 결혼할 때도 자신의 재산을 남편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혼전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는 결혼 뒤에도 재산을 따로 관리하며 철저한 독립성을 유지했다. 물려받은 자산을 바탕으로 주식, 채권, 부동산 등 여러 분야에 투자했고, 이를 통해 재산을 크게 불렸다.
기이할 정도로 철저했던 절약 방법
헤티 그린이 월가의 마녀라는 별명을 얻게 된 배경에는 자산 규모와 어울리지 않는 생활 습관이 있었다. 그는 평생 단 한 벌의 검은색 실크 드레스를 해질 때까지 입었고, 옷이 해지면 새로 사기보다 고쳐 입었다. 양말도 버리지 않고 꿰매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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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탁비와 비누값까지 아끼려 했다. 드레스 전체를 자주 세탁하지 않고, 바닥에 끌려 더러워진 치맛단 부분만 빨았다. 옷차림은 늘 검소했고, 값비싼 장신구나 화려한 사교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음식값도 최대한 줄였다. 상점에서는 가장 저렴한 과자 부스러기나 상태가 좋지 않은 과일을 골라 샀다. 부유한 자산가라면 당연히 누릴 법한 생활과는 정반대였다. 그에게 돈은 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지키고 불려야 하는 자산이었다.
개인 사무실을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도 낭비로 봤다. 그는 자신이 주로 거래하던 케미컬 은행을 업무 공간처럼 활용했다. 은행 안에서 신문을 깔고 앉아 서류와 장부를 확인하며 업무를 처리했다. 은행 측은 거액을 예치한 주요 고객인 그를 함부로 내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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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 방식도 남달랐다. 그는 세금과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뉴욕과 뉴저지 일대의 저렴한 하숙집을 옮겨 다녔다. 겨울철에는 난방비를 아끼고, 식사도 간단히 해결했다. 막대한 재산과 어울리지 않는 생활 방식은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07년 금융공황과 뉴욕의 구원투수
헤티 그린의 진가는 1907년 미국 전역을 강타한 금융공황 시기에 뚜렷하게 드러났다. 당시 미국의 주요 신용신탁회사들이 흔들리면서 주식 시장은 급락했고, 금융 시스템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은행과 자산가 상당수가 현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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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헤티 그린은 막대한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활황기 때 과열된 자산을 매각하고 현금을 쌓아 둔 덕분이었다. 그는 시장 분위기에 휩쓸려 무리하게 투자하지 않았고, 위기 때 움직일 수 있는 돈을 손에 쥐고 있었다.
시중의 자금이 마르자 뉴욕시는 재정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뉴욕 시장 조지 매클레런은 급히 헤티 그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린은 뉴욕시가 발행한 단기 수익 채권을 110만 달러어치 매입했고, 필요한 자금을 공급해 뉴욕시가 위기를 넘기는 데 도움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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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금난에 빠진 은행과 기업에도 돈을 빌려줬다. 다만 조건은 분명했다. 가치가 보장되는 부동산이나 확실한 채권을 담보로 요구했다. 위기 상황에서도 손실 가능성을 줄이는 방식으로 움직였고, 동시에 흔들리던 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
유행을 거부한 냉철한 투자법
헤티 그린의 자산 증식 비결은 대중의 유행을 따르지 않는 데 있었다. 그는 시장에 거품이 끼고 투기 열풍이 불 때 자산을 무리하게 사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철도 주식이나 부동산 시장이 과열되면 자산을 팔아 현금을 확보했다.
전쟁이나 공황으로 자산 가격이 폭락하면 그는 움직였다. 모두가 공포에 빠져 자산을 내다 팔 때, 그린은 저평가된 우량 자산을 사들였다. 비싸게 사서 더 비싸게 팔려는 방식이 아니라, 싸게 사서 적정한 시기에 파는 방식을 고수했다.
그의 투자 철학은 낮은 가격에 사서 높은 가격에 파는 원칙에 기반했다. 유행을 좇는 투기성 주식 거래를 철저히 멀리하고, 미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와 철도 우선주, 성장 가능성이 있는 지역의 부동산과 모기지 채권에 집중했다.
그린은 자산의 보전과 유동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돈을 많이 버는 것만큼 손실을 피하는 일을 중시했다. 현금을 확보해 둔 태도는 여러 금융 위기 속에서도 그를 버티게 한 핵심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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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드리운 절약의 그늘
돈을 모으고 불리는 데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지만, 극단적인 절약 집착은 가족에게 비극을 안겼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그의 아들이 어린 시절 다리를 다쳤을 때 발생했다.
그의 아들은 썰매를 타다가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헤티 그린은 비싼 의료비를 지불하지 않으려 했고, 아들을 데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자선 병원을 찾았다. 치료가 늦어지면서 부상 부위는 악화됐다. 결국 아들은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이 사건은 헤티 그린에게 잔혹한 구두쇠라는 오명을 남겼다. 그는 나중에 아들에게 좋은 의족을 마련해 주고, 성인이 된 뒤 사업 자금도 지원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치료 시기를 놓친 일은 그의 이름 뒤에 오래 남았다.
딸도 어머니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성장했다. 헤티 그린은 딸에게도 절약을 강요했고,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을 경계했다. 가족에게까지 돈을 지키는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한 셈이다.
마녀가 남긴 거대한 유산
헤티 그린은 1916년 뉴욕에서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그가 남긴 재산은 최소 1억 달러에서 최대 2억 달러 규모로 기록된다.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힐 만큼 큰 금액이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조 원에 이르는 막대한 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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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어두운 옷을 입고 생활비를 아끼며 모은 자산은 두 자녀에게 상속됐다. 그러나 자녀들의 삶은 어머니의 삶과 정반대였다. 아들은 유산을 상속받은 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호화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여러 저택을 사들이고, 요트와 자동차를 수집했다. 희귀 동전과 우표 수집에도 많은 돈을 썼다. 어머니가 평생 피했던 소비를 아들은 거리낌없이 선택했다.
딸 역시 어머니와 다른 방식으로 재산을 사용했다. 그는 자선 단체와 공공기관에 많은 재산을 남겼다. 헤티 그린이 평생 지키고 불린 돈은 다음 세대에서 소비와 기부의 형태로 세상에 다시 흘러갔다.
헤티 그린의 삶은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 확보한 현금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역발상 투자의 힘을 명확히 보여준다. 1907년 금융공황 속에서 뉴욕시를 구한 일화는 그의 냉철한 자산 관리 방식이 실제 시장에서 증명된 대표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가족의 치료와 삶까지 돈의 기준으로만 재단하며 남긴 비극은 절약의 집착이 불러온 어두운 이면을 잘 보여준다. 그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이 상반된 두 얼굴 때문이다. 그는 돈을 모으는 법만큼, 돈을 써야 할 순간을 아는 일도 중요하다는 교훈을 남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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