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와 21세기를 대표하는 영국 출신 화가가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런던 자택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으며, 89번째 생일을 한 달여 앞둔 시점이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그의 홍보 담당자가 12일 이 소식을 공식 발표했다.
1937년 7월 9일 영국 요크셔주 브래드퍼드에서 세상에 나온 그는 런던 왕립예술대를 거쳐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30세가 채 되기 전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끊임없는 실험 정신으로 자신의 이름 자체를 하나의 예술 장르로 만들어냈다. 초상화와 정물, 풍경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전통적 일점소실 원근법에서 벗어난 독자적 시각 언어를 구축했다.
작년 프랑스 파리 전시 에세이에서 영국 역사학자 사이먼 샤머가 남긴 평가가 있다. AP 통신 보도에 의하면 그는 "모든 형태의 변화와 창의적 실험이 끊이지 않기에 그 인기와 지속성은 전혀 놀랍지 않다"고 썼다.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몰려들어 감탄하는 이유로 "즐거움에 대한 기대가 작품 속에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덧붙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체류 시절 탄생한 수영장 연작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1967년작 '더 큰 첨벙'이 특히 유명하며, 유명 패션디자이너 부부를 담은 '클라크 부부와 퍼시'(1971)와 '예술가의 초상'(1972)도 걸작 반열에 올라 있다. 물과 유리창에 반사되는 빛의 패턴으로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무광 아크릴 물감으로 인물을 단순화하는 기법이 특징이다.
201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예술가의 초상'이 9천30만 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1천19억원)에 낙찰되며 생존 작가 최고가 기록이 세워졌다. 이듬해 제프 쿤스의 '토끼'가 9천107만5천 달러로 이 기록을 경신했다.
오랜 세월 캘리포니아의 햇살 가득한 교외 풍경이 주요 모티프였다. 노년기에 유럽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는 고향 요크셔의 숲과 프랑스 노르망디의 들판에서 새로운 영감을 길어 올렸다. 2021년 파리 전시 당시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정말 아름답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회화에만 머물지 않았다. 1987년 LA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 무대와 의상 디자인에 참여했고, 판화·사진 콜라주·비디오 아트로 영역을 확장했다. 디지털 기기에도 열린 자세를 보여 아이패드를 적극 활용한 드로잉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기 재위를 기리기 위해 2018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스테인드글라스 '여왕의 창'을 헌정했다. 2012년 경미한 뇌졸중을 겪었고 말년에는 청력이 떨어졌으나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2023년 런던으로 돌아온 뒤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2017년 영국 대중지 더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다. "나를 젊게 유지하는 것은 일이다. 60년간 전문 화가로 살았고, 매일 아침 눈을 떠 하고 싶은 일을 해왔다."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며 자녀도 두지 않았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려 회화·드로잉·판화 133점이 공개됐고, 3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전시장을 찾았다. 2023년에는 서울 고덕동 라이트룸 서울에서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 '비거 앤 클로저'가 개최됐다. 기획 단계부터 직접 참여한 전시로, 아이패드 드로잉 작업 과정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다만 공식적인 방한은 끝내 이뤄지지 않아 직접 만남을 기대했던 국내 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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