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지방 반도체 투자설이 확산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지역 균형발전과 지방소멸 대응을 주요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기업들의 판단 기준은 더욱 복합적인 상황이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전력과 용수, 부지, 인력 등 생산 인프라 확보가 핵심 과제로 떠올랐고, 이 조건을 국내에서 충족할 수 있느냐가 향후 투자 결정의 주요 변수로 작용하는 모습이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광주 반도체 패키징 공장 신설 가능성이 거론된다. 후보지로는 광주 첨단3지구와 전남 장성 일대가 오르내린다. 첨단3지구는 AI 집적단지와 연구산업복합단지 조성이 추진되는 지역으로, 대규모 변전소 등 기반시설을 갖춘 점이 강점으로 평가된다. 삼성전자가 광주에 후공정 기지를 마련할 경우 1991년 충남 온양캠퍼스 이후 국내 패키징 생산기지를 추가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호남권 투자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지만, 실제 투자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다. SK하이닉스는 이미 충북 청주에 19조원을 투입해 첨단 패키징 공장 P&T7 건설에 들어간 상태다. 경기 용인과 충북 청주를 주요 생산 거점으로 삼고 있는 만큼, 전남권까지 생산망을 확대할지는 추가 검토가 필요한 대목이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국내뿐 아니라 일본과 미국 등 해외 후보지도 함께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양사가 지방 투자 가능성을 들여다보는 배경에는 AI 반도체 경쟁 구도의 변화도 자리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과거 반도체 경쟁이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전공정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최근에는 고대역폭메모리(HBM)처럼 여러 칩을 정교하게 쌓고 연결하는 패키징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후공정은 전공정과 비교해 전력과 용수 부담이 상대적으로 낮아 지방 거점화 가능성이 있는 분야로 분석된다. 광주에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 등 후공정 기업이 자리하고 있고, 앰코가 1조원 규모 증설을 추진하는 점도 지역 기반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거론된다.
다만 지방 반도체 투자 논의를 균형발전 차원으로만 풀이하기에는 산업 구조가 복잡하다. 반도체 생산은 대기업 공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장비사와 소재·부품 기업, 검사 업체, 연구기관, 숙련 엔지니어가 함께 움직여야 하는 대표적인 생태계 산업이다. 경기도 평택·화성·용인과 충청권에 반도체 관련 기업이 집중된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전공정 팹의 호남 이전 또는 분산 배치 가능성도 거론됐지만, 업계에서는 물류비와 공정 효율, 협력사 동반 이동 부담 등을 고려할 때 현실성이 크지 않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발언도 이런 고민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최 회장은 일본 도쿄에서 열린 닛케이포럼 이후 기자들과 만나 “어딘가에 반도체 공장이 가려고 하면 전력도 땅도 사람도 물도 다 갖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무조건 한국에만 짓겠다는 것도 아닐 수 있다”며 “우리나라에서 안 되면 해외라도 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업계에서는 이 발언을 지방 투자 논의가 균형발전 차원을 넘어 국내 생산 여건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의 문제로 확장됐다는 신호로 보고 있다.
정부 역시 국내 투자 여건을 마련하는 데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최 회장의 발언과 관련해 “‘한국에서 안 되면’이 아니라 ‘어떻게 한국에서 되게 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달 말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리는 주요 그룹 총수 간담회에서도 비수도권 투자 방안이 테이블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구미를 소재·부품, 부산을 전력반도체, 광주를 첨단 패키징 거점으로 묶는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 구상도, 이 같은 정책 기조와 맞닿아 있다.
정책 방향을 둘러싼 이견도 적지 않다. 정부가 반도체특별법 시행령에서 수도권을 클러스터 지정 대상에서 배제하는 방안을 검토하자 경기도는 우려를 나타냈다. 김동연 경기지사는 “지역 간 제로섬 경쟁으로 가서는 안 된다”며 “가장 경쟁력 있고 대체불가한 경기도 클러스터를 신속하게 지정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균형발전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더라도 이미 대규모 투자가 진행 중인 수도권 클러스터의 경쟁력까지 약화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지역 정치권의 기대감도 변수로 남아 있는 모양새다. 지방선거 이후 호남권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유치론이 다시 힘을 받는 분위기다. 일부 정치인은 10조원 이상 규모의 반도체 시설 유치를 공약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다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관련 관측에 대해 “아는 바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 노조도 사측에 사실 확인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인 투자 계획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정치권의 기대와 기업의 실제 의사결정 사이에 간극이 남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 공공기관 지방 이전의 경험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혁신도시는 일부 성과를 냈지만, 상당수 지역에서는 의료·교육·교통 등 정주 인프라 부족으로 인구 유입 효과가 제한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도체는 공공기관 이전보다 산업적 연계성이 훨씬 높은 분야다. 공장 부지와 전력 확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협력사와 인재가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생활·산업 기반이 뒷받침돼야 한다.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투자 결정을 서두를 경우 기업과 지역 모두 기대한 효과를 얻기 어려울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지방 투자 검토는 균형발전 명분과 국내 생산 여건 확보라는 현실적 필요가 맞물린 사안으로 볼 수 있다. 수도권 클러스터의 대체보다는 후공정 중심의 보완 거점을 마련하되, 전력·용수·부지·인력 등 투자 조건을 얼마나 갖추느냐가 핵심 변수로 꼽힌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방 투자는 균형발전 측면에서도 필요하지만, 반도체 산업에서는 입지보다 생태계 준비가 더 중요하다”며 “전력과 용수, 부지뿐 아니라 협력사, 인력, 정주 여건까지 갖춰져야 기업들이 해외가 아닌 국내 투자를 선택할 수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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