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흉내내던 사내, 피카소가 픽한 거장 [화폭역정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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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흉내내던 사내, 피카소가 픽한 거장 [화폭역정 15]

이데일리 2026-06-12 07:4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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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루소의 ‘잠자는 보헤미안 여인’(1897). 수많은 루소의 걸작 중 가장 신비롭고 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사막, 만돌린, 잠든 여인, 사자, 달빛 등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조합으로 무의식 혹은 꿈의 세계를 시각화했다. 특히 맹수인 사자가 잠든 사람을 덮치지 않고 지켜만 보는 설정은 지극히 비현실적인데, 산업화·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19세기 말 유럽에서 인간 문명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이상을 암시했다고도 읽힌다. 훗날 초현실주의가 추구한 방식과 흡사하지만 그보다 30여년을 앞섰다. 이후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등 후대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캔버스에 유채, 129.5×200.7㎝. 뉴욕현대미술관(미국 뉴욕) 소장.




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작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세상에는 너무 늦었다 싶을 때 비로소 자기 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내가 그랬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생계를 위해 한몸을 바친 뒤에야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조차 누구에게도 인정이나 보증을 받지 못한 혼자만의 감행이었다. 어렵게 화가가 된 이후에 생긴 별명은 ‘르 두아니에’, 세관원이었다. 예술과는 아무 상관 없는 말단 행정직을 뜻하는 그 별명에는 은근한 조롱이 깃들어 있었다.

실상 세관원조차 되지 못했다. 그가 일한 곳은 파리시의 통행세 징수소였으니, 파리로 들어오는 포도주나 농산물에 대한 세금을 받던 자리였던 것이다. 정식 세관원은커녕 시의 통행료나 거두는 말단 창구직원이었고, 그 일을 하는 동안 한 번도 승진을 못한 채 자리를 지켜야 했다. 통행세 징수소에서 퇴직하던 마흔아홉 살까지 말이다.

그 화가 앙리 루소(1844~1910)는 프랑스 서부의 작은 도시 라발에서 가난한 판금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은 늘 빠듯했고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가면서 중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 뛰어나 상을 받기도 했지만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집안의 맏아들에게는 사치스러운 재능일 뿐이었다. 열아홉 살 무렵 그는 군에 입대하는 길을 택했다.

◇그림 앞 박장대소…조롱 끊이지 않았던 ‘화단의 광대’

훗날 루소가 멕시코에 종군했고 정글을 그린 그림들은 직접 본 것이란 이야기가 떠돌았는데, 그 자신이 적극적으로 거짓을 지어냈는지, 아니면 떠도는 소문을 굳이 바로잡지 않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미술사가들이 거듭 확인한 바에 따르면 루소는 평생 프랑스 땅을 한 발짝도 벗어난 적이 없다. 루소 작업의 모티프는 멕시코 정글이 아니라 파리 식물원의 온실과 동물원의 우리, 박제 진열장과 값싼 삽화집, 그림엽서에서 상상으로 길어 올린 이국적 풍경이었다. 루소는 본 것을 그린 화가가 아니라 보지 못한 것을 지어낸 화가였다.

군을 제대하고 스물일곱 살이던 1871년 파리의 통행세 징수원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루소의 길고 단조로운 직장생활이 시작된다. 그는 미술학교의 문턱도 밟지 못했다. 여유라곤 ‘취미 미술’ 정도를 할 수 있는 퇴근 후 저녁시간과 휴일 한나절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대단한 무기가 하나 있었으니 어마어마한 낙천성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루소가 그림을 처음 출품한 것은 마흔두 살이던 1885년 ‘앙데팡당 전’이었다. 심사 없이 누구나 작품을 낼 수 있는 자리였다. 루소는 그곳에 해마다 출품했다. 그리고 해마다 조롱을 받았다. 관람객들은 그의 작품 앞에서 비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를 화단의 광대쯤으로 여기는 시선은 오래 지속됐다. 그런데 실제로 그림 앞에서 피식거리거나 배꼽을 잡고 웃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루소는 자신의 그림을 좋아해서 웃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앙데팡당의 평을 쓰는 한 평론가가 ‘루소는 눈을 감은 채 발로 그림을 그린다’라고 한 비평문을 소중히 스크랩하며 자신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대단한 화가가 됐다고 뿌듯해했다. 이후엔 이런 평을 듣기도 했다. ‘루소는 회화를 쇄신하려는 듯하다. 이른바 초상풍경은 그의 발명이니 뻔뻔한 자들이 모방하지 못하도록 특허를 내길 권한다.’ 이 글 역시 루소는 잘 오려 간직했다. 초상과 풍경을 구분조차 못한다는 조롱이었으나 자신을 초상풍경의 창시자라고 불러준 것에 자랑스러워했다.

세상의 비웃음을 한몸에 받은 그 초상풍경은 ‘나 자신, 초상-풍경’(1890)이란 루소의 자화상이었다. 검은 베레모를 쓰고 한 손에 팔레트를 들고 우뚝 선 사내. 베레모와 팔레트,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알아주는 화가의 표상이 아니겠는가. 그는 스스로 화가의 의장을 갖추고 그림 한복판에 자신을 세웠다. 오늘의 말로 옮기자면 화가 코스프레였다.

앙리 루소의 ‘나 자신, 초상-풍경’(1890). 에펠탑·열기구 등이 등장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근대 문명 중심에 루소가 스스로를 세운 기념비적인 자화상이다. 자신을 화가로 당당히 선언한 자부심이 묻어 있다. 어색한 원근, 깨진 비례 등이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루소만의 화풍을 오히려 도드라지게 했다. 전통적인 초상화나 풍경화에서 벗어나 풍경 속에 인물의 정체성까지 담은 ‘초상 풍경’을 개척한 점도 특별하다. 캔버스에 유채, 146×113㎝. 프라하국립미술관(체코 프라하) 소장.


인물은 화면을 거의 가득 채우며 정면을 향해 섰는데 그 크기에 비해 뒤편의 도시풍경은 까마득히 작게 그려졌다. 그 배경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기억이다. 센 강에 띄운 배에는 만국기가 달려 있고 아직 새것인 황갈색 에펠탑도 보인다. 이 모두는 근대 문명의 자랑스러운 표지였고, 루소는 자신을 그 중심에 세웠다. 근대 파리의 풍경은 자신이 마땅히 속해야 할 세계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 속에 사는 화가로서의 자신이라는 순수한 낙천성을 구현한 것이다.

1893년 루소는 마침내 퇴직하고 연금에 기대어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연금은 쥐꼬리만 했으니 바이올린과 그림 레슨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야 했고 작품은 여전히 팔리지 않았다. 세상이 그 결정을 지지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루소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들은 모두 이 뒤늦은 출발 이후 탄생했다.

전업작가가 된 지 꼭 4년 만에 루소는 ‘잠자는 보헤미안 여인’(1897)을 완성했다. 가로로 길게 펼쳐진 큰 화폭에는 검푸르게 표현한 밤하늘, 성근 별빛과 환한 달빛이 내린 사막이 잔잔하게 펼쳐져 있다. 사막에는 알록달록한 줄무늬 옷을 입은 여인이 깊이 잠들어 있고 만돌린과 항아리가 놓여 있다. 그 잠든 여인의 곁으로 갈기를 드리운 사자 한 마리가 다가와 코를 들이대며 냄새를 맡고 있다.

이 장면이 자아내는 긴장은 묘하다. 화면 어디에도 공포는 없다. 사자는 기이할 정도로 온순하며 사려가 깊어 보이기까지 한다. 사막에는 물이 흐르고, 맹수는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떠도는 가난한 여인은 황량한 밤의 한복판에서 더없이 평온하게 잠든다. 현실에서는 결코 허락되지 않을 이 안식을 루소는 화면 위에 실현했다.

루소는 이 그림을 고향인 라발 시에 판매하기 위해 시장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제안은 단칼에 거절 당했다. 시 입장에서는 정규 국전인 살롱전에 입선하지도 못한 무명의 독학 화가가 어떤 보증도 없는 작품을 사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한동안 잊혔던 이 그림은 1920년대 어느 미술상의 손에 발견됐는데, 너무 뛰어나 되레 위작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까지 했다. 결국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지금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모마) 501호 ‘19세기의 혁신가들’이란 전시실에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더불어 상설 전시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라발 시는 아까운 기회를 놓친 셈이다.

1907년 앙리 루소. 생을 마감하기 3년 전 프랑스 파리 페렐 거리 자신의 작업실에서다. ‘도르낙’이란 이름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 저명한 정치·문화 인물들로 방대한 초상사진 시리즈를 남긴 프랑스 사진작가 폴 프랑수아 카르동이 촬영했다.


◇평생 변두리에 있던 노화가, 젊은 예술가들 한복판에

무시와 조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루소의 확신은 생애 끝자락에 이르러 마침내 보답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알아본 것은 기성 화단의 권위자들이 아니라 젊은 예술가들이었다. 1908년 젊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파리 몽마르트르의 허름한 화실에서 루소의 예술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반은 진지하고 반은 익살스러운 이 잔치에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화가 후안 그리스와 마리 로랑생, 수집가 거트루드 스타인을 비롯해 당대의 전위적인 미술인사들이 모여들었다. 평생 미술의 변두리에 서 있던 노화가가 새 시대를 열어 갈 젊은이들의 한복판에 귀빈으로 앉은 저녁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루소는 다리에 생긴 종기를 대수롭지 않게 방치했고 병원에 실려 갔을 때는 이미 괴저가 진행된 상태였다. 급히 수술을 했으나 패혈증에 시달리던 루소는 1910년 예순여섯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가난한 장례였지만 무덤가에는 젊은 벗들이 모였다. 아폴리네르가 비문을 썼고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가 그 글귀를 돌에 새겼다. “우리는 그대에게 인사하네, 온화한 루소여, 그대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리.”

베레모를 쓰고 팔레트를 든 채 화폭 한복판에 서 있던 그 무명의 사내를 다시 떠올린다. 세상의 온갖 맹수 같은 조롱과 멸시가 그의 곁을 어슬렁거렸으나 그는 끝내 깨어나지 않고 자기만의 꿈을 꿨다. 그 꿈이 너무도 간절했기에 어떤 맹수도 끝내 그를 삼키지 못했다. 시작은 늦었지만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루소의 그림은 지금도 우리의 발걸음을 붙든다. 이렇게 멀리까지 자신의 작품이 가닿는 꿈이었을까.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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