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0일, 도쿄 제국호텔. 닛케이포럼 한일 특별세션을 마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기자들 앞에 섰다. 용인 클러스터 4기 다음 공장을 어디에 지을 것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최태원 회장은 "우리나라에서 안 되면 해외라도 가야 하는 상황 아니냐"고 말했다.
6월 8일,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를 조만간 공개하겠다"고 밝혔고, 같은 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호남·충청권 후공정 투자가 거론된다는 보도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SK 총수는 하이닉스 공장의 해외 진출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정부가 투자 프로젝트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릴 때, SK 총수는 도쿄에서 "해외도 열려 있다"고 응수한 것이다.
최태원 회장의 발언 배경에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있다. SK하이닉스가 2019년 발표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총 투자 규모는 120조 원이며, 입주 시점은 2027년으로 잡혀 있다. 그런데 첫 삽까지 5년이 걸렸다. 수도권 공장 총량제 예외 인정에만 2년 넘게 소요됐다. 환경영향평가에서 용인 지역은 통과했지만, 인접 지자체의 반대로 다시 막혔다. 짓는 데 1년, 허가받는 데 5년. 이것이 한국 반도체 인허가의 공식이다.
인프라 문제는 더 구조적이다. 용인 클러스터가 완공되면 필요한 전력은 10~16GW로, 원전 10~16기와 맞먹는다. 하루 용수 수요는 107만 2,000톤이다. 그 전기를 동해안에서 수도권으로 끌어오려면 초고압 송전선이 필요하다. 그런데 충청과 경기 남부의 농민들이 송전탑 앞에 머리띠를 두르고 섰다. 2026년 1월에는 100여 개 시민단체가 '용인 반도체·송전선로 반대 전국행동'을 출범시켰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보고서에서 직설적으로 적었다. "수용성 확보 문제를 풀지 못하면 건설 지연은 불가피하다."
전기가 없으면 팹은 빈 건물이다. 물이 없으면 웨이퍼는 한 장도 생산하지 못한다. 최태원이 도쿄에서 "전력도, 땅도, 사람도, 물도 다 갖춰져야 한다"고 한 발언은 추상적인 인프라론이 아니었다. 용인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반면 일본 정부는 TSMC 구마모토 1·2공장에 1조 2,000억 엔, 약 11조 원을 지원했다. 3공장 검토 소식이 나오자 추가로 7,320억 엔을 얹었다. 단순한 현금이 아니다. 부지 무상 제공, 전력·용수 등 기초 인프라의 국가 주도 구축, 정부 보장의 인력 공급망까지 묶인 풀 패키지였다.
닛케이는 올해 2월 SK하이닉스가 일본 일부 지자체에 공장 후보지 검토를 타진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SK는 즉각 부인했다. 그러나 4개월 뒤 최태원은 도쿄에서 "해외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미국도 다르지 않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38억 7,000만 달러를 들여 HBM 후공정 공장을 짓고 있다. 미국 정부는 칩스법으로 직접 보조금 4억 5,800만 달러와 저리 대출 5억 달러를 확정했다. 총 투자금의 약 25%를 미국 납세자가 댄 셈이다. 미 행정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반도체 공장 건설 시 연방 환경영향평가를 면제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미국은 환경평가까지 면제하는데, 한국은 환경평가 협의 범위 설정만으로 1년을 쓴다.
2025년 2월 K칩스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반도체 시설 투자 세액공제율을 상향했고, 업계 추산 세 부담 경감 효과는 3조 6,000억 원으로 평가됐다. 2026년 1월에는 반도체특별법도 본회의를 통과했다. 재적 206명 중 찬성 199명이었다.
그러나 반도체특별법에서 R&D 인력의 주 52시간 예외 조항은 끝내 빠졌다. 부칙에 "근로시간 특례에 대해서는 추후 논의한다"는 한 줄이 들어갔을 뿐이다.
세제 혜택은 줬다. 인허가 패스트트랙도 일부 포함됐다. 그러나 한국 반도체가 일본·대만에 밀리는 핵심 영역, 즉 R&D 인력의 노동시간 유연화는 빠졌다. 업계 관계자는 K칩스법에 대해 반쪽짜리 지원 법안이라고 평가했다.
일본 정부의 지원 방향은 '기업이 들어오면 정부가 짓는다'가 아니라 '정부가 먼저 부지·전력·용수를 깔아두고 기업을 들인다'는 순서다. 따라서 우리나라 정부도 호남·충청권 후공정 산단을 검토한다면, 첫 삽은 기업이 아니라 정부가 부지와 인프라를 조성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기업이 부지 확보부터 시작하면 5년이 또 흘러간다. 정부의 선제적 지원이 필요하다.
[폴리뉴스 박수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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