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날. 밥 먹는 내내 그의 시선은 핸드폰에만 고정돼 있다. 대화가 툭툭 끊기는 걸 참다못해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 - “오랜만에 같이 밥 먹는데 나 좀 봐주면 안 돼? 계속 핸드폰만 보니까 서운하네.”
이 한마디에 그가 핸드폰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을 쉬며 상처받은 얼굴로 창밖을 본다.
- - “요즘 회사 일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잠깐 본 건데, 넌 꼭 사람을 그렇게 매정하게 몰아붙이더라. 나 지금 기분 엄청 상했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대화
서운함을 꺼낸 건 나인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뒤집힌다. 눈앞에는 내 무심한 말에 깊은 상처를 받은 가여운 피해자만 앉아 있다.
방금 그가 한 행동에는 이름이 있다. 심리학자 제니퍼 프리드는 이런 수법을 DARVO라 불렀다. 부인하고(Deny), 공격하고(Attack),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꾼다(Reverse Victim and Offender).
잠깐 봤을 뿐이라 발뺌하고, 네가 매정하게 몰아붙인다고 공격하고, 끝내 자기가 상처받은 피해자 자리에 올라앉는다. 세 동작이 1분 안에 끝난다.
내현성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잘못이 드러나는 상황을 어떻게든 피하려 든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대신, 상처받은 약자의 자리로 내려가 숨는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네가 날 몰라준다”며 억울해하는 식이다. 그렇게 문제의 원인이었던 무례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상대를 몰아세운 내 뾰족한 말투와 배려 없는 성격뿐이다.
서운함을 말해놓고 사과하게 될 때
침묵이 길어지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내가 너무 예민했나 싶어 결국 먼저 꼬리를 내린다.
- - “아니, 몰아붙이려던 건 아니야. 일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지. 미안해, 화 풀어.”
내가 사과를 건네자 그제야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위로받으려 꺼낸 이야기 끝에, 도리어 상대의 기분을 달래고 사과까지 바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입은 무겁게 닫힌다. 갈등을 풀려다 비난만 뒤집어쓰고 감정노동까지 해야 하니 지친다. 불만이 쌓여도, 말해봤자 또 상처받은 척하며 내 탓을 할 게 뻔하니 지레 체념한다.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약자의 권리
그런데 그 여린 마음은 자기가 불리할 때만 편리하게 등장한다. 며칠 뒤, 내가 약속에 십 분 늦자 그가 여지없이 쏘아붙인다.
- - “너는 매번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기다리는 사람 생각은 안 해?”
목소리에 날이 바짝 서 있다. 피곤했다거나 사정이 있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자기가 잘못했을 때는 한없이 다치기 쉬운 영혼이 되더니, 상대의 실수 앞에서는 가차 없는 심판관이 된다. 그가 내세운 상처받은 얼굴은, 책임을 피하려고 그때그때 꺼내 쓰는 얄팍한 방패다.
상처를 달래주지 않고 일어설 때
다시 찾아온 주말 데이트. 그가 또 내 말을 건성으로 넘긴다. 서운함을 비치자 여지없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쉰다.
- - “너는 왜 항상 사람을 숨 막히게 해? 나 지금 너무 상처받았어.”
예전 같으면 당황해서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이번엔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선다.
- - “상처받았다면 미안한데, 내 서운함도 마찬가지야. 오늘은 이만 갈게.”
잘못을 지적받으면 억울함을 연기해 입을 막으려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내 감정을 설명하느라 진을 뺄 이유가 없다. 상처받은 척에 동참해 다급하게 달래주는 일도 그만둔다. 변명하지 않고 미련 없이 돌아선다. 가짜 상처를 달래느라 내 진짜 서운함을 미룰 이유는 없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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