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전쟁이 100일을 넘기며 호르무즈 해협 봉쇄도 석 달가량 지속됐지만 최근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 미만으로 거래돼 예상보다 급등하지 않았다는 평가다. 가격 상승으로 인한 중국의 원유 수입 감소, 미국의 수출 증대, 사우디아라비아의 홍해 우회 수출 등이 주된 원인으로 꼽히는 가운데 미군 지원으로 호르무즈 해협에서 '암흑 항해'로 탈출하는 유조선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크리스 라이트 미 에너지장관은 9일(현지시간) 미 워싱턴DC에서 열린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 주최 세계에너지포럼 행사에서 지난 1~2주간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 통행량이 "매우 의미있게 증가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정상적 에너지 흐름"이 회복되려면 "수 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분석업체에 따르면 최근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 수가 소폭 늘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해양정보업체 로이드리스트인텔리전스 자료를 보면 분쟁 발발 뒤 선박 60척 이상이 위치 신호를 보내지 않은 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했다고 전했다. 해양데이터업체 윈드워드에 따르면 지난주 이러한 '암흑 항해' 통행 건수가 평균 2건에서 6건으로 늘었다. 신문은 이러한 증가세는 부분적으로 미군의 공중 지원 덕분이라고 운송 상황을 잘 아는 해운업계 관계자를 인용해 덧붙였다.
일부 전문가는 호르무즈 해협이 3개월가량 마비 상태임에도 국제유가가 예상만큼 치솟지 않은 데 암흑 항해를 포함한 은밀한 통행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됐다고 본다. 미 CNN 방송을 보면 JP모건은 5월 마지막 2주간 이러한 은밀한 원유 운송이 하루 210만배럴에 달한 것으로 추산했다. 전쟁 전 일일 약 2000만배럴 운송량에 비하면 적지만 의미가 없지 않은 양이다.
미 투자은행 파이퍼샌들러의 세계에너지경제학자 얀 스튜어트는 5월 하루 약 290만배럴의 원유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것으로 추정하며 이 중 210만배럴가량은 이란 쪽에 통행료 지불, 나머지는 트랜스폰더(위치추적장치)를 끈 암흑 항해를 통한 것으로 봤다. 그는 CNN에 이러한 "유령 항해 혹은 은밀한 항해"가 예상보다 위기 완화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뒤 국제유가 기준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한때 배럴당 110달러 이상으로 올랐지만 최근 다시 100달러 밑에서 거래 중이다. 분쟁 이전 가격인 배럴당 70달러 수준보다는 높지만 분쟁 초기 예상치인 120~150달러 수준보단 훨씬 낮다.
중국, 5월 원유 수입 8년만 최저 수준…가격 급등에 생산량 줄이고 비축분 활용하는 듯
물론 암흑 항해가 유가 급등 완화의 주된 요인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 중 하나인 중국이 원유 수입을 대폭 줄인 것이 가격 상승 압력을 줄이는 핵심 역할을 했다고 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 해관총서 자료를 인용해 중국이 5월 일평균 782만배럴의 원유를 수입했는데 이는 전년 동기 대비 29% 감소한 수치이자 8년 만에 월간 기준 최저 수준이라고 짚었다.
해관총서에 따르면 중국은 올해 2~3월엔 월간 4800만~5000만톤가량의 원유를 수입했지만 4월 3847만톤, 5월 3308만톤으로 수입량이 급격히 줄었다. 환산하면 5월엔 일평균 400만배럴가량 수입이 줄어든 셈이다. 이는 전쟁 전 호르무즈 해협 일일 운송량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중국 정유사들이 원유 가격이 오른 상황에서 생산을 줄이고 비축분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파이낸셜타임스>를 보면 스위스에 기반을 둔 상품거래업체 군보르의 시장분석책임자 프레데릭 라세르는 원유 가격 완화의 "핵심 요인은 중국"이라며 "그들은 충분한 재고를 보유 중이고 특히 해협이 개방돼 원유 가격이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면 배럴당 80달러나 90달러가 넘는 가격에 시장에 들어와 원유를 사들일 의향이 전혀 없다"고 분석했다. 신문은 중국이 수입을 줄이며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원유를 좀 더 쉽게 사들일 수 있는 효과도 있다고 덧붙였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자 걸프국들이 홍해를 통한 에너지 수출을 늘리고 있는 것도 공급 부족 압력을 완화 중이다. CNN을 보면 파이퍼샌들러는 하루 약 450만배럴 원유가 호르무즈 해협 이외 경로로 페르시아만에서 반출되고 있는 것으로 추산했고 이 중 대부분이 사우디아라비아가 홍해 얀부항을 통한 수출을 증대한 결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수출 증대도 원유 가격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 9일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4월 미국 원유 및 석유제품 순수출량은 하루 580만배럴로 사상최고치를 기록했고 5월에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최후 공급자' 미 원유 재고 20년만 최저 수준…아시아 각국 경쟁적 원유 비축 시도도
다만 전문가들은 수출 증가로 미국 석유 재고가 이미 2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파이낸셜타임스>를 보면 에너지정보업체 케이플러 분석가 맷 스미스는 현재 미국이 "최후의 공급자" 역할을 수행 중인데 재고 감소로 미국 수출이 둔화될 경우 "의지할 수 있는 대체 공급처가 거의 없다"고 짚었다. CNN은 비축량 감소로 미 당국이 수출 제한을 고려할 가능성도 우려했다.
여름철 전력 수요가 느는 상황도 불안 요소다. 설사 호르무즈 해협이 3분기에 개방되더라도 분쟁 이전 수준으로 정상화 되기까진 수 개월이 더 소요돼 2027년 초 회복이 가능할 것으로 미 에너지정보청은 내다봤다. 중국이 계속해서 원유 수입량을 낮게 유지할지도 지켜봐야 한다.
해협이 개방되더라도 각국이 이번 경험을 통해 경쟁적으로 비축유를 늘릴 수 있어 가격 상승 압력이 한동안 지속될 거라는 분석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인도 등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원유의 주요 목적지인 아시아 국가들이 이러한 계획을 수립 중이라며 이러한 조치들이 석유 시장 공급 부족을 심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파이낸셜타임스>를 보면 군보르의 라세르 분석가는 "해협 폐쇄 2주 정도 더 지속된다면 전세계적 침체 수준의 최악 상황은 피할 수 있겠지만 세 달 더 지속된다면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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