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왕과 사는 풍경> 은 16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떠올리며 출발했다. 조선 왕릉은 우리 일상생활권에 있지만, 막상 선뜻 발걸음이 닿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왕릉을 낯선 유적으로만 두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장소로 다시 살펴보려 한다. [편집자주] 왕과>
[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선릉은 가장 익숙한 이름을 가진 조선왕릉 가운데 하나다. 지하철역 이름으로, 빌딩 숲 사이 걷는 휴식 공간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능역 안쪽으로 들어가면 익숙함은 금세 낯섦으로 바뀐다. 홍살문과 정자각, 언덕 위 봉분과 돌짐승은 주변 도로의 속도와 다른 시간을 붙든다.
선릉은 조선 제9대 국왕 성종(成宗·1457년 8월 28일 ~ 1495년 1월 29일)과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1462년 7월 30일 ~ 1530년 9월 23일)의 능이다. 선정릉 권역 안에서 정릉과 나란히 기억되지만, 선릉 자체는 성종과 정현왕후의 두 언덕으로 구성된 동원이강릉이다.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면 왼쪽 언덕이 성종, 오른쪽 언덕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도심에 남은 선릉을 볼 때 성종의 업적만 앞세우면 능역의 성격이 흐려진다. 선릉은 성종의 무덤인 동시에 광평대군 묘역 이전, 성종과 정현왕후 능침의 차이, 임진왜란 도굴과 개장, 봉은사 원찰 기록, 숙종 대 보수까지 여러 시간이 겹친 왕릉이다. 강남 한복판의 숲처럼 보이는 공간 안에는 조선왕릉의 제도와 전란의 상처가 함께 남아 있다.
◇광평대군 묘역 위에 들어선 성종의 능
선릉의 자리는 본래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 묘역이었다. 성종이 1494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세상을 떠나자 조정은 광주 학당리, 현재 강남구 삼성동 일대를 능지로 정했다. 성종의 장례가 치러진 1495년, 광평대군 묘역은 현재 강남구 수서동 방면으로 옮겨졌다. 왕릉 조성은 기존 왕족 묘역까지 움직일 만큼 강한 위계를 가진 국가 의례였다. 능지 결정에는 풍수 논의도 따랐다. 당시 원로들은 자리를 높게 평가했다. 선릉의 종산을 청계산으로, 조산을 청계산·관악산·우면산 계열이다. 대모산을 앞산으로 보는 인식도 있다. 성종 능침은 북북서에 앉아 남남동을 향한 임좌병향이다. 정현왕후 능침은 성종 능침 왼쪽 언덕에 동원이강형으로 자리했다.
정현왕후는 1530년 경복궁 동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종 국장 후 36년이 흐른 뒤였다. 선릉 동쪽 언덕에 안장됐고, 당시에는 별도 능호를 새로 정하지 않은 채 ‘새 선릉’으로 불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종 능과 정현왕후 능은 하나의 선릉으로 통칭됐다. 같은 능역 안 두 언덕은 서로 다른 시기의 장례가 만나 하나의 제향 질서로 묶인 결과다.
◇법전의 왕 성종, 반정의 문턱에 선 정현왕후
성종은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와 소혜왕후 한씨의 둘째 아들이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를 잃었다. 1469년 작은아버지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13세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1476년부터 직접 정치를 펼쳤다. 성종 대 조선은 법전과 의례, 학문 정비에서 성과를 남겼다. 세조 대부터 편찬하던 '경국대전'을 1485년에 반포했고, '대전속록'으로 법제를 보완했다. 국가 의례를 정리한 '국조오례의'도 완성됐다.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악학궤범' 편찬도 성종 대의 중요한 문화 사업이었다. 사림을 등용해 훈구 세력과 국정 균형을 꾀한 점도 자주 거론된다.
정현왕후의 삶은 선릉 너머 조선 중기 정치사와 닿는다. 본관은 파평, 부친은 윤호다. 1473년 성종의 후궁이 되어 숙의에 봉해졌다. 폐비 윤씨가 왕비 자리에서 물러난 뒤 1480년 왕비로 책봉됐다. 연산군을 길렀고, 중종반정 때 친아들 진성대군의 즉위를 허락했다. 선릉의 오른쪽 언덕은 성종의 왕비 자리이자 연산군·중종의 왕실사를 함께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병풍석을 두른 왕, 난간석만 남긴 왕비
선릉의 핵심은 두 능침의 차이다. 성종 능침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모두 둘러졌다.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조각돼 방위를 드러낸다. 반면 정현왕후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같은 선릉 안에 있으나 왕과 왕비의 봉분은 능제의 세부에서 확연히 갈라진다. 능침 공간은 상계·중계·하계로 나뉜다. 봉분을 중심으로 석물이 서 있는 상계는 능주의 중심 영역이다. 한 단 아래 중계에는 팔각 장명등과 문석인이 자리한다. 낮은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자리 잡는다. 봉분 주변에는 석양과 석호가 서로 엇갈리듯 서며 능침을 수호한다. 성종 능침과 정현왕후 능침 모두 석양·석호가 2쌍씩, 모두 8마리로 구성된다.
선릉의 문석인과 무석인은 조선왕릉 가운데 크기가 비교적 큰 편으로 평가된다. 성종 능침 앞 공간은 넓다. 하계 앞 평지는 급한 경사로 사초지와 연결된다. 왕릉의 위계는 봉분의 높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어느 위치에 어떤 석물이 서 있는지, 장명등과 문무석인이 어떤 거리로 능침을 지키는지, 언덕과 평지가 어떻게 호흡하는지가 선릉의 권위를 이룬다. 정현왕후 능침은 성종 능침보다 장식이 절제돼 있다.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봉분을 감싼다. 그러나 석양과 석호,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마의 구성이 왕릉의 격식을 유지한다. 선릉 답사에서는 두 언덕을 각각 따로 보아야 한다. 성종 능침의 병풍석과 정현왕후 능침의 난간석 차이를 확인하는 순간 동원이강릉이 한 능호 안에서도 서로 다른 능제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임진왜란 도굴과 개장, 선릉의 깊은 상처
선릉을 다른 왕릉과 구분하는 가장 강렬한 사건은 임진왜란 때 벌어졌다. 1592년 전란이 시작된 뒤 선릉과 정릉은 왜군의 도굴 피해를 입었다. 기록에는 왜적이 선릉을 파헤쳐 재궁, 곧 관까지 불에 탄 사실이 전한다. 왕릉은 조선 왕실의 성역이었지만 전쟁 앞에서는 무참히 훼손됐다. 1593년 조정은 개장도감을 설치해 선릉 수리에 나섰다. 광중은 이미 비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전주사고에 보관된 실록을 근거로 지석문과 옥책문을 등사했다. 시신 대신 의대를 묻기로 했다. 마침내 1593년 7월 선릉은 다시 장례를 치렀다. 선릉은 전쟁으로 파괴된 뒤 국가가 다시 예를 세운 능이다.
개장 뒤에도 선릉의 정비는 오랜 시간을 거쳤다. 표석 건립은 오랫동안 미뤄졌다가 1774년 영조의 허락으로 세워졌다. 정자각과 석물 보수 기록도 남아 있다. 숙종 대에는 난간석, 장명등, 망주석의 틈을 석회로 보수했다. 정현왕후 능의 석마 훼손도 논의됐다. 정자각은 1706년 중건됐다. 현재 정자각은 당시의 모습을 상당 부분 간직한 것으로 평가된다. 선릉 주변 사찰의 변화도 능역 이해에 중요하다. 성종 능 조성 당시 가까이 있던 견성사는 선릉의 원찰로 활용됐다. 정현왕후의 뜻에 따라 연산군이 견성사를 중창하려 하자 신료들은 불교식 제례가 유교국가의 이념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반대했다. 뒤이어 사찰은 선릉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로 옮겨졌다. 봉은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세워졌다. 명종 대 이후 봉은사는 선릉과 정릉 제향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조포사 역할도 맡았다.
광평대군 묘역을 옮겨 조성한 능, 왕과 왕비의 능제가 서로 다른 동원이강릉, 임진왜란으로 파헤쳐진 뒤 다시 장례를 치른 왕릉, 봉은사와 제향 물자 관계를 맺은 능역이다. 강남 도심 한복판의 숲은 조용하지만, 침묵은 가볍지 않다. 선릉의 언덕과 돌은 조선왕릉이 정치·전쟁·제례·복구의 시간을 모두 품은 공간이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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