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디어뉴스] 김상진 기자 =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 박준
독서가 취미라는 사람을 만나면 그의 슬픔을 먼저 읽고 싶어진다
어떤 문장에 밑줄을 긋는 순간은 그 문장이 내 슬픔의 높이와 맞닿았을 때이므로
그가 고른 책들의 목차를 보며 그가 지나온 외로움의 방들을 상상한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내가 이토록 깊은 어둠 속을 걸어왔노라고,
이토록 얇아진 마음을 지닌 채 여전히 살아 있노라고,
누군가에게 조용히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구경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슬픔의 무게를 나누어 메는 동행이므로
오늘 밤 네가 읽다 만 책의 책장을 넘기며
나는 네가 흘렸을 보이지 않는 눈물의 자국을 더듬어본다
[서평 talk]
박준의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는 독서와 슬픔, 그리고 타인의 내면을 읽는 일에 대해 말하는 시다. 이 작품에서 책은 단순한 취미의 대상이 아니다. 한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외로움, 말하지 못한 상처가 조용히 남아 있는 자리다.
첫 구절은 “독서가 취미라는 사람을 만나면 그의 슬픔을 먼저 읽고 싶어진다”로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독서는 취향이나 지적 관심으로 이해되지만, 시인은 그보다 먼저 슬픔을 본다. 어떤 사람이 읽어온 책, 오래 붙잡은 문장, 밑줄 그은 구절은 그 사람의 내면을 비추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문장에 밑줄을 긋는 순간은 그 문장이 내 슬픔의 높이와 맞닿았을 때”라는 구절은 이 시의 핵심이다. 우리는 아무 문장에나 밑줄을 긋지 않는다. 유난히 오래 시선이 머무는 문장은 대개 자신의 경험과 닮아 있거나, 말로 설명하지 못했던 감정을 대신 말해주는 문장이다. 밑줄은 독자의 마음이 문장에 닿은 자리이며, 슬픔이 언어를 만난 순간이다.
시인은 “그가 고른 책들의 목차를 보며 그가 지나온 외로움의 방들을 상상한다”고 말한다. 한 사람이 고른 책의 목록은 그 사람의 인생 지형도와도 같다. 어떤 제목을 오래 붙잡았는지, 어떤 작가에게 기대었는지, 어떤 문장을 다시 읽었는지는 그가 지나온 외로움의 방을 조용히 드러낸다.
두 번째 연에서 시인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흔히 슬픔은 숨겨야 할 것, 약함의 증거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시는 슬픔을 다르게 바라본다. 슬픔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한 사람이 깊은 어둠을 지나왔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내가 이토록 깊은 어둠 속을 걸어왔노라고”라는 문장은 슬픔을 견딘 사람의 고백이다. 어둠 속을 걸어왔다는 것은 무너졌다는 뜻만이 아니다. 그 길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슬픔은 상처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생존의 기록이 된다.
이어지는 “이토록 얇아진 마음을 지닌 채 여전히 살아 있노라고”라는 구절은 더욱 아프다. 슬픔을 겪은 마음은 두꺼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얇아진다. 작은 말에도 찢기고, 작은 온기에도 쉽게 젖는다. 그러나 그 얇아진 마음으로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은 조용한 존엄이 된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슬픔을 과시하지 않는 태도다. 시인은 슬픔을 떠벌리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조용히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증거”라고 말한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은 남을 압도하기 위한 자랑이 아니다. 오래 견뎌낸 사람이 조심스레 내미는 삶의 증명서에 가깝다.
마지막 연은 타인의 슬픔을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구경하는 자들이 아니라 / 그 슬픔의 무게를 나누어 메는 동행”이라는 구절은 이 시가 가진 윤리를 보여준다. 타인의 아픔을 소비하거나 흥미롭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함께 나누는 일이 진정한 관계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의 고통을 본다. 뉴스와 화면, 소셜미디어 속에서 누군가의 슬픔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장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박준의 시는 말한다. 슬픔은 구경할 것이 아니라 함께 들어야 할 무게라고. 타인의 밑줄과 눈물의 자국 앞에서 우리는 조금 더 조심스럽고 다정해야 한다고.
“오늘 밤 네가 읽다 만 책의 책장을 넘기며 / 나는 네가 흘렸을 보이지 않는 눈물의 자국을 더듬어본다”는 마지막 구절은 이 시의 가장 따뜻한 장면이다. 읽다 만 책은 그 사람이 잠시 내려놓은 마음과도 같다. 그 책장을 넘기는 일은 타인의 삶을 함부로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레 이해하려는 행위다.
박준의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는 슬픔을 약함이 아니라 깊이로 읽어낸다. 슬픔을 겪은 사람은 그만큼 많은 것을 잃었지만, 동시에 타인의 아픔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얻는다. 이 시가 건네는 위로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이 작품은 말한다. 슬픔은 감춰야 할 흠이 아니라, 어둠을 지나온 사람의 조용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무게를 조금씩 나누어 메는 동행이어야 한다고.
그래서 이 시를 읽고 나면 책장 사이에 남겨진 밑줄 하나도 다르게 보인다. 누군가가 그은 밑줄은 단순한 표시가 아니라, 그가 살아내며 남긴 마음의 흔적일 수 있다. 슬픔은 때로 그렇게 문장이 되고, 밑줄이 되고, 누군가에게 건네는 조용한 자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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