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론 안팎에서 '고교학점제' 폐지론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인공지능(AI) 시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미래 인재 육성에 역행한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유명 경영인이나 전문가들은 'AI 시대'로 대변되는 미래에는 전문 지식 보단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이른바 '멀티 플레이어'가 인정받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은 충분히 AI로 대체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그러나 '고교학점제'는 제도 취지나 목표 자체가 특정 분야에 대한 집중 학습을 통해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쪽으로 크게 치우쳐져 있다.
AI시대 멀티플레이어가 인재라는데…고교생에 특정 분야 집중학습 유도하는 '엇박자 정책'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기준 학점(192점)을 채우면 이수(졸업)하도록 하는 제도다. 가령 예·체능에 관심이 없는 학생이라면 음악, 미술 등과 같은 과목 대신 본인이 관심 있는 과목만을 선택하는 식이다. 과목별 이수 조건은 40% 이상의 학업 성취율, 3분에 2이상 출석 충족 등이다. 획일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자기 주도적 인재 양성과 학생 중심의 맞춤형 교육을 실현한다는 게 제도 취지다. 2017년 처음 논의됐으며 2021년 구체적인 계획안 발표, 이후 각 학교 별로 단계적 도입을 거쳐 지난해부터 전체 학교에 도입됐다.
해당 제도는 도입 전부터 찬·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찬성 측에서는 ▲학생의 과목 선택권 존중 ▲절대평가로 인한 경쟁 불필요 등의 장점을 내세웠다. 반면 반대 측에서는 ▲특정 과목 쏠림 ▲특정 과목 기피에 따른 학력 저하 ▲학교 별 개설 과목 편차 ▲너무 이른 나이에 진로 선택 강요 등의 부작용을 우려했다. 특히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교육단체는 일제히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보수 성향 교원단체인 한국교총 내부 설문조사에선 72.3%가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진보 성향의 전교조 내부에서도 65.8%가 '재검토 및 문제점 개선 필요'를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들어 기존에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의 부작용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고교학점제 폐지 또는 보안 여론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고교학점제가 국가 경쟁력과 직결돼 있는 미래 인재 육성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고교 학점제가 최초 논의되기 시작한 시점은 인공지능(AI) 기술에 대한 고민조차 없었지만 불과 몇 년 새 AI 기술이 눈에 띄게 발전하면서 사회 전체가 AI 중심으로 재편되고 인재 기준도 180도 바뀌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세계 각국의 저명한 전문가들과 글로벌 기업 경영인들은 AI시대 인재 기준은 과거와 전혀 다를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특히 과거에는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인재로 분류됐다면 앞으로는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선호하는 기조가 뚜렷해질 것이라는 견해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취향이나 자발적 진로 선택을 고려한다는 이유로 특정 분야나 관련 지식에 물리적 시간을 더욱 많이 투입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SK하이닉스를 통해 전 세계 AI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앞서 한 강연에서 AI시대 인재상에 대한 보편적인 견해를 소개했다. 당시 강연 내용에 따르면 인공지능(AI) 시대에는 특정 분야만 깊게 아는 스페셜리스트 보다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인간과 AI가 공존하는 새로운 시스템과 사회를 설계할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형 인재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게 된다. 이를 위해 △생각 △공감 △적응 △바디스킬 등 AI가 할 수 없는 4가지 영역에서 인간만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아울러 현재 우리는 인간이 질문하면 답을 내놓는 '리즈닝(Reasoning) AI' 시대를 지나고 있다. 앞으로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에이전틱(Agentic) AI' 시대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에는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능력 차이는 지금보다 훨씬 더 커질 수 있다. 개인뿐 아니라 기업과 국가 역시 AI를 얼마나 빨리,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양극화가 심화될 수도 있다. 동시에 AI가 업무 상당 부분을 대신하게 되면서 여러 역할과 일을 동시에 수행하는 멀티잡이 가능해지고 기존의 '9 to 6' 중심 근무 방식과 정형화된 직업 개념 역시 점차 변화할 전망이다.
채용 기준 손질하는 글로벌 기업들, 외우고 반복하는 능력 대신 소통·도전정신 높이 평가
세계 각국의 글로벌 기업들의 채용 기준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단순 암기형 지식이나 반복형 기술의 습득 여부 보다 문제 해결 능력, 창의적 사고, 협업 능력, 질문 설계 능력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오히려 AI 도구를 통해 암기형 지식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능력으로 인정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일례로 메타는 코딩(컴퓨터 프로그래밍) 면접에서 지원자에게 AI 사용을 허용하고 있다. 앤스로픽도 채용 과정에서 AI 이용을 금지 정책을 철회했고 어도비는 지원자에게 AI를 활용한 지원서 작성을 권고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의 채용 방향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관련 구직 분야 관련 지식이나 전문성 보유, 관련 학과 전공자 등을 우대했다면 소통·협업·리더십 등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하반기 기업 인사담당자 500여명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기업 채용 트렌드'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신입 사원의 핵심 역량으로 소통·협업 능력(55.4%)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직무 전문성(54.9%) ▲도전정신·문제해결능력(25.8%) ▲창의성·혁신 역량(25.0%) ▲실행력·주도성(20.8%) 등의 순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A기업 인사채용 담당자는 "요즘에는 전 세계적으로 AI 활용을 권고하는 추세이다 보니 사실 암기로 습득한 각종 지식이나 정보, 일정한 패턴이 정해진 단순 업무 처리 능력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추세다"며 "AI에게 맡기면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일을 잘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인적 네트워크나 소통 능력, 새로운 아이디어 발굴 등 AI가 전혀 할 수 없는 일들이나 AI에 효과적으로 업무를 지시하는 능력이 더욱 절실하다"며 "아마 앞으로 대규모 채용 보단 핵심 인재 선호 기조가 뚜렷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능력은 갈수록 높게 평가받게 될 것이다"고 전망했다.
전문가들도 비슷한 견해를 내비쳤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AI 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단순히 업무의 자동화를 넘어 기존의 직업 개념과 고용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며 "과거 산업화 시대의 교육 방식은 변화무쌍한 미래 노동 시장에서 청년들을 오히려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글로벌 기업들이 채용 트렌드를 바꾸고 있는 것은 단편적 지식보다 소통, 협업,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사회적 역량이 생존의 무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며 "현행 고교학점제는 아이들에게 너무 이른 시기부터 진로를 정해주는 부작용이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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