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국민 참정권 보장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발달장애인 유권자들이 투표 보조를 거부당해 투표하지 못하는 등 장애인의 참정권 침해가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일 투데이신문 취재에 따르면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와 한국피플퍼스트, 전국장애인부모연대가 지난 3일 마무리된 제9회 지방선거와 관련해 온라인으로 발달장애인 권리 차별 신고를 접수한 결과 약 60건의 사례가 확인됐다.
대표적인 사례는 인천과 서울, 대구 등에서 확인됐다. 인천에 거주하는 한 발달장애인은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으로 투표 보조를 요청했지만 선거 관계자로부터 “발달장애인은 투표 지원이 어렵다”는 안내를 받고 결국 투표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구의 한 발달장애인은 혼자 기표소에 들어갔지만 제대로 투표하지 못한 채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나왔고, 부산에서는 투표 보조를 받지 못한 장애인이 항의의 뜻으로 기표하지 않은 투표용지를 제출한 사례도 있었다.
경기 하남에서는 한 발달장애인 보호자가 “자녀가 소근육 발달이 약해 혼자 기표하기 어렵다”고 설명했지만 “발달장애인은 투표 보조가 안 된다”는 이유로 보조가 거부된 사례가 접수됐다. 서울의 한 투표소에서도 발달장애인이 설명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만 지원받을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장애인 유권자들이 제기하는 가장 큰 문제는 투표소마다 투표 보조 기준이 달랐다는 점이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발달장애인에게도 투표 보조가 제공됐지만 다른 곳에서는 거부됐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측은 본보에 “현장 선거사무원이 매뉴얼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거나 장애 특성을 적극적으로 확인하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문제는 수년째 반복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0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제21대 총선 당시 지적장애인 투표율은 48.2%, 자폐성장애인은 42.3%로 전체 장애인 투표율(78.4%)보다 크게 낮았다.
장애인단체들은 2020년 총선부터 발달장애인에 대한 투표 보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투표율이 급감했다고 보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는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장애 유형과 관계없이 본인이 기표할 수 없는 경우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매뉴얼을 정비하겠다고 밝혔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보조 지원 거부가 이어졌다.
장애인단체가 제기한 차별구제 소송에서 1심과 항소심은 모두 발달장애인도 공직선거법상 투표 보조 대상에 포함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선관위가 관련 내용을 매뉴얼에 명시해야 한다고 판결했지만, 선관위는 이에 불복해 상고했고 현재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장애인단체와 대학 내 장애인권 동아리들은 최근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계기로 확산된 참정권 침해 논의가 비장애인 유권자에만 국한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일부 지역의 투표용지 부족 문제가 재선거 요구로 이어지고 있는 반면 장애인 유권자들이 수년간 겪어 온 참정권 침해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일대에는 시민 약 350명(오전 11시 기준, 경찰 추산)이 모여 재선거를 촉구했다. 이들은 지난 3일 지방선거 본투표 당시 일부 지역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에 차질이 빚어진 데 반발하며 전국 재선거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앙대학교 수어동아리 ‘손끝사이’는 성명을 통해 “투표용지 부족 사태 이전에도 어떤 시민들의 참정권은 온전하게 보장된 적이 없었다”며 “선관위는 이번 사태를 엄중히 인식하고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참정권을 누릴 수 있도록 대안을 강구하고 도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건국대학교 장애인권동아리 ‘가날지기’ 회장단 역시 같은 취지의 성명을 내고 “참정권은 비장애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며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투표 과정에서 정당한 편의를 제공받지 못해 권리를 잃는다면 그것은 공정하고 평등한 선거라 부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장애인 참정권 보장 요구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제도 도입 방식에는 신중론을 제기했다. 전날 열린 취임 1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는 청년들에 대해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장애인 참정권 보장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그는 “사전 투표가 전국에서 이뤄지고 전국 출마자 수가 적지 않은 만큼 그림투표가 이뤄진다면 투표소가 혼란스러워질 것”이라며 “해결 방법은 전자투표인데, 전자투표가 이뤄질 경우 부정투표 의혹이 불거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발달장애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농인, 시각장애인 참정권 문제도 존재하는 만큼 생각한 것처럼 간단한 문제는 아니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면서 “고려할 것이 많겠지만 소외된 사람들도 국민으로서 최대한 기본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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