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이예서 기자】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미래 성장축으로 삼은 인공지능(AI) 사업이 엔비디아와의 전략적 협력을 계기로 속도전에 돌입한다. AI 반도체 핵심 부품인 HBM 시장을 선점해 온 SK하이닉스와 AI 혁신을 외치고 있는 SK텔레콤이 선봉에서 글로벌 AI 인프라 구축의 핵심 파트너로 활약을 예고했다.
최 회장과 젠슨 황 CEO는 8일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에서 만나 차세대 AI 메모리 공동개발과 글로벌 AI 인프라 구축을 골자로 한 협력 확대 방안을 발표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와 AI 팩토리용 차세대 메모리를 공동 개발하고, SK텔레콤은 엔비디아와 AI 팩토리·AI 클라우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HBM 공급 중심이던 협력이 AI 인프라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양사의 관계가 전략적 동맹으로 격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협력은 방한 기간 동안 이어진 연쇄 회동을 통해 구체화됐다. 최 회장과 젠슨 황 CEO는 지난 5일 서울 홍대 인근에서 식사를 함께한 데 이어 전날 서울 강남의 한 치킨 매장에서 다시 만났고, 이날 공식 기자회견에 나란히 섰다. 최 회장은 이번 방한 기간에만 젠슨 황 CEO와 세 차례 직접 만나 그룹 차원의 AI 전략을 집중 논의했다. 뿐만 아니다. 방한에 앞서 이달 초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아시아 최대 IT 전시회 ‘컴퓨텍스 2026’ 행사를 통해 이틀에 걸쳐 별도 회동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최 회장과 젠슨 황 CEO가 대만과 한국을 오가는 약 일주일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연이어 접점을 이어간 것은 이례적인 밀착 행보”라며 “단기적 만남을 넘어 AI 시대를 전제로 한 장기 전략 파트너십으로 협력 관계가 확대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와 엔비디아가 이날 발표한 장기 기술 파트너십의 핵심은 AI 팩토리용 차세대 메모리 공동 개발이다. 양사는 엔비디아의 AI 인프라 로드맵에 맞춰 차세대 메모리를 함께 개발하고 안정적인 공급 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또한 AI 슈퍼컴퓨터와 AI PC, 로보틱스 플랫폼 등 차세대 AI 시장에서도 협력을 확대할 계획이다.
특히 양사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플랫폼인 베라 루빈 AI 슈퍼컴퓨터와 베라 CPU, RTX 스파크 PC, 젯슨 토르 로보틱 컴퓨팅 플랫폼용 메모리를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AI 인프라뿐 아니라 퍼스널 AI와 피지컬 AI 시장까지 함께 공략하겠다는 의미다.
최 회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그동안 엔비디아와의 협력은 주로 메모리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SK그룹과 엔비디아가 협력하는 더 큰 그림으로 발전할 것”이라며 “미래 AI 팩토리를 함께 만들고 연구개발(R&D) 로드맵도 공유해 AI 수요 변화에 더 빠르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젠슨 황 CEO 역시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가장 큰 메모리 파트너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SK와의 파트너십이 없었다면 오늘날 AI 산업은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양사의 협력은 메모리를 넘어 AI 인프라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SK텔레콤과 엔비디아는 엔비디아 DSX 플랫폼 기반의 ‘풀스택 AI 클라우드’ 구축에 나선다. 양사는 칩과 네트워크, 데이터센터 운영을 아우르는 AI 팩토리를 구축하고, 이를 한국에서 시작해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SK텔레콤은 2027년 우리나라에서 첫 AI 팩토리를 가동한 뒤 단계적으로 GW(기가와트)급 규모로 확장해 아시아 대표 AI 클라우드 사업자로 도약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AI 클라우드는 기존의 범용 클라우드와 달리 AI 학습, 추론, 데이터 처리 등 인공지능 작업에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 모델이다. 이 시장은 최근 글로벌 AI 인프라 공급망의 핵심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젠슨 황 CEO는 “전 세계 AI 인프라 구축은 이제 시작 단계이며 향후 10년 이상 지속될 것”이라고 확언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AI 생태계를 갖춘 한국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AI 인프라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업계가 주목하는 또 다른 변화는 연구개발 협력이다. 양사는 반도체 설계와 제조 과정에도 AI를 적극 도입하기로 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CUDA-X 라이브러리와 PhysicsNeMo 프레임워크를 활용해 반도체 설계와 제조 시뮬레이션 효율을 높이고 있으며, 향후 EDA와 시뮬레이션 분야 전반으로 협력을 확대할 예정이다.
양사의 긴밀한 관계는 컴퓨텍스 현장에서도 확인됐다. 젠슨 황 CEO는 지난 2일 대만에서 열린 행사에서 SK하이닉스 HBM4E 웨이퍼에 직접 “Please Make More”라는 문구를 남겨 화제를 모았다. AI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는 상황에서 SK하이닉스의 생산 역량이 AI 공급망의 핵심 변수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으로 받아들여졌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2025년 2분기 기준 HBM 출하량 점유율 62%로 1위를 기록했으며, 3분기 매출 기준으로도 57%를 차지하며 시장 주도권을 유지하고 있다. 2013년 세계 최초로 HBM을 개발한 이후 2014~2015년 상용화에 성공했지만 초기에는 제한된 수요로 주류 기술로 자리 잡지 못했다. 그러나 2022년 이후 생성형 AI 확산으로 고대역폭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면서 시장 구조가 급변했다. 현재는 엔비디아 AI 가속기의 핵심 공급사로 자리 잡으며 AI 반도체 생태계의 중심축으로 평가받고 있다.
업계 안팎에서는 이번 협력을 최 회장이 그려온 AI 전략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HBM을 앞세워 AI 공급망의 핵심 기업으로 자리 잡은 SK그룹이 이제는 AI 팩토리와 클라우드, 로보틱스, 디지털 트윈까지 아우르는 종합 AI 인프라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의 관계가 고객사와 공급업체 성격이 강했다면 이제는 AI 시대를 함께 설계하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바뀌고 있다”며 “이번 협력은 글로벌 AI 공급망과 인프라 시장에서 이미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SK의 위상을 한층 더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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