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난 지 닷새가 지났지만 서울 잠실 일대의 집회는 현재진행형이었다. 월드컵경기장 인근 핸드볼경기장 앞에는 이른 오전부터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시민들이 “부정선거”를 재선거와 당일 현장 수개표 시스템 도입을 요구했다.
8일 서울 실시간 도시데이터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 기준 올림픽공원 일대 인구는 1만~1만2000명으로, 혼잡도는 ‘여유’ 수준을 보였다. 전날 4만명 이상이 몰렸던 것과 비교하면 한산한 분위기였지만, 핸드볼경기장 앞에서는 수백 명 규모의 집회가 며칠째 이어지며 장기 농성 국면으로 접어든 모습이었다.
잠실에 시민들이 모여든 것은 이 지역에서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관리 부실에 따른 투표용지 부족 논란이 가장 크게 불거졌기 때문이다. 본투표일인 지난 3일 잠실7동 제2투표소를 포함해 서울 시내 14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소진됐고 이를 계기로 부정선거 의혹과 재선거 요구가 확산됐다.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서는 일부 시민과 보수 성향 유튜버, 극우 성향 참가자들이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경위 규명과 개표 중단을 요구하며 투표함 반출을 막아섰으나, 이후 지난 5일 경찰이 투입되면서 투표함은 반출됐다. 제2투표소 앞에 모여 있던 이들은 투표함 반출 이후 개표가 진행된 월드컵경기장 핸드볼경기장 앞으로 이동했고 이날까지 집회를 이어 왔다.
핸드볼경기장 앞 집회 양상은 최근 며칠 사이 미묘한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일부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기존 강성 보수·극우 진영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실제로 전날 현장에서는 ‘부정선거’ 대신 ‘재선거’ 요구에 집중하고 성조기 대신 태극기만 사용하자는 취지의 제안이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는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층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윤어게인’ 세력과의 동일시를 피하고 보다 폭넓은 시민운동의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일부 참가자들은 특정 정치인 지지 운동이 아니라 선거 절차에 대한 검증 요구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 시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월요일 들어 현장에서는 다시 기존 집회 세력과 사실상 한 목소리를 내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부정선거, 재선거” 구호가 재등장했고 재선거 요구와 함께 국회·정부 해산에 대한 요구를 드러내는 집회 용품도 다수 목격됐다.
2030 청년이 지목한 해결책은 ‘당일 현장 수개표’
이번 집회에서 주목받는 부분은 청년층의 참여다. 과거 부정선거 의혹 집회가 중장년층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이번 현장에서는 20~30대 참가자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청년들은 대체로 선거 당일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참정권 침해 문제를 집회 참여의 계기로 꼽았다.
20대 직장인 A씨는 토요일부터 사흘째 현장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집회에 나온 이유에 대해 “동네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를 못 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국민의 기본권인 참정권이 박탈당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국민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짚었다.
그는 서울 송파구 주민이지만 직접 투표용지 부족을 겪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SNS를 보다가 바로 옆 개표소에서 투표용지 부족 문제가 발생했다는 얘기를 봤고 노인이나 20대 청년에게 경찰복을 입은 사람이 폭력을 행사해 유혈 사태가 있었다는 내용도 접했다”며 “그런 사태를 마주하니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인천에서 온 20대 직장인 B씨도 비슷한 이유를 들었다. 그는 “원래 인터넷에서 부정선거 관련 내용을 보며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실제로 피부에 와닿는 느낌이 컸다”며 “일부 지역에서 투표를 아예 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이번에는 나와서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재선거와 함께 선거제도 전반에 대한 검증과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선관위가 ‘당일 현장 수개표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전투표를 없애고 선거 당일 투표 종료 직후 개표사무원이 직접 투표지를 확인해 집계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현행 개표는 투표 마감 뒤 투표함을 개표소로 이송한 뒤 투표지분류기, 수검표, 심사·계수 절차를 거쳐 진행된다. 투표지분류기는 ‘보조장치’이며 최종 판단은 사람이 한다.
서울 강서구에서 왔다는 20대 직장인 C씨는 “그냥 재선거가 이뤄지면 안 되고 부정선거 의혹이 밝혀진 뒤 재선거가 이뤄져야 한다”며 “부정선거도 밝혀지고 재선거도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30대 직장인 D씨도 “효율성을 우선하기보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투명한 방법으로 당일 투표, 당일 수개표를 해야 한다”면서 “정치권에서 재선거만 이야기하고 당일투표나 수개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똑같은 방식으로 선거를 다시 하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충북 청주에서 올라온 20대 휴학생 E씨 역시 “참정권 훼손 문제에 공감하는 시민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만큼 지금은 재선거 요구와 선거제도 개선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당일 투표, 당일 개표가 필요하다. 선거관리기관이 국민들에게 충분한 신뢰를 주지 못한 만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투명한 방식으로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호소했다.
‘음모론·극우 진영’과 분리?...“분란 조장” 의견 대부분
일각에서 극우 진영과 재선거 집회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등장한 성조기와 ‘윤어게인’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서는 청년들 사이에서도 시각차가 엿보였다. 다만 현장에서 목소리를 낸 대부분의 청년들은 극우 진영과 재선거 집회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분란을 일으킨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A씨는 “이 문제는 좌우파를 떠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라며 “한미 군사동맹이 명백히 존재하는데 왜 재선거와 관련해서만 성조기를 문제 삼는지 모르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금 여기서 성조기가 중요한 부분은 아닌 것 같다”며 “국기를 가지고 싸울 때는 아니라고 본다. 지금은 부정선거 이슈가 더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D씨 역시 “성조기를 들든 태극기를 들든, 예배를 드리든 목탁을 두드리든, 부정선거를 외치든 재선거를 외치든 다 한마음으로 온 것”이라며 “성조기를 든 사람들이 나라를 생각하지 않아서 온 것이 아니라 같은 마음으로 온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성조기를 든 사람은 안 된다거나 재선거만 외쳐야 한다는 식으로 나누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며 “서로 존중하고 같은 마음이라는 점을 보는 게 중요하다. 저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분란을 만드는 일”이라고 부연했다.
C씨도 “극우가 잘못된 것이라고 몰아가는 관점이 잘못된 것 같다”며 “북한 국기를 드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B씨 역시 “집회 참여에 기준을 나눠 분란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 것 같다”면서도 “99%는 평화롭게 구호만 외치고 자원봉사를 하고 경찰분들도 챙기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서울 성북구에서 온 30대 남성 E씨는 “어제까지는 성조기를 들지 않기로 했었는데, 어떤 깃발을 들든지 자유롭게 집회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가치라는 주장이 나와 성조기도 허용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F씨는 다른 견해를 내놨다. 자신 역시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자라고 밝히면서도 “이곳은 특정 정당이나 특정 단체의 공간이 아니라 순수한 시민들이 모여 재선거를 요구하는 자리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조기나 특정 정치세력을 상징하는 물품이 전면에 나오면 언론이나 반대 진영이 집회의 본질보다 다른 부분을 부각할 수 있다”며 “태극기를 중심으로 재선거 요구에 집중하는 것이 더 많은 시민들의 공감을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전날 현장에서 일부 참가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과 관련해 F씨는 “분열 직전까지 갈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실망해서 돌아간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며 “지금은 서로를 공격하기보다 참정권 훼손 문제와 재선거 요구라는 공통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고 짚었다.
당일 현장 수개표, 대한민국에서도 가능할까
재선거를 요구하는 집회 참가자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요구 중 하나는 ‘당일 현장 수개표’다. 사전투표를 폐지하고 선거 당일 투표 종료 직후 투표소 또는 현장 개표소에서 개표사무원이 직접 투표지를 확인해 집계하자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이 방식이 투표함 이송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논란을 줄이고 선거 결과에 대한 국민 신뢰를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대만은 투표 종료 후 각 투표소를 곧바로 개표소로 전환해 수작업으로 개표를 진행한다. 개표사무원이 투표지를 한 장씩 공개하며 집계하는 방식이다.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부정선거 논란을 차단하고 선거 결과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전면 수개표를 검토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다만 현실적인 한계도 존재한다. 현행 한국 선거제도는 사전투표와 거소투표, 재외국민투표 등을 함께 운영하고 있어 투표 당일 현장 수개표를 도입하려면 관련 제도 전반의 개편이 필요하다. 또한 현재도 개표 과정에서 투표지분류기로 분류한 뒤 개표사무원이 육안으로 확인하는 수검표 절차를 거치고 있으며 전면 수개표로 전환할 경우 막대한 인력과 시간이 추가로 소요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선관위가 사실상 리더십 공백 상태에 놓였다는 점도 변수다. 지난 5일 노태악 선관위원장이 사의를 표명한 가운데 대통령 지시에 따라 선관위는 검경 합동수사 대상에 오른 상황이다. 선거를 관리해야 할 기관이 책임론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선관위가 당장 선거제도 개혁을 주도하기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결국 선관위의 선거관리 시스템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은 현재 불거진 의혹과 책임 소재가 먼저 정리된 뒤에야 본격화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재선거 요구와 당일 현장 수개표 도입 논의 역시 선관위 수사 결과와 조직 정상화 여부에 따라 향방이 갈릴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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