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서 막 꺼낸 맥주를 단숨에 들이키며 이가 시릴 정도의 차가움을 즐기는 것. 한국인들에게 맥주란 이런 것이다. 그런데 맥주의 본고장 유럽에서는 이 풍경이 낯설고 심지어 황당한 대접을 받는다.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가 사실은 미국 대형 맥주 기업들이 설계한 마케팅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한국·일본·동남아시아의 차가운 맥주 문화가 그 마케팅의 영향권 아래 형성됐다는 것은 맥주 문화를 들여다보면 확인되는 사실이다.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AI 툴로 만든 사진.
독일 가정에서 맥주는 주방 냉장고가 아니라 지하 저장고인 '켈러(Keller)'에 보관되는 경우가 많다. 독일 주택에는 지하실이 있는 경우가 많고, 마트에서 24병짜리 맥주 케이스를 통째로 사 오면 지하실에 그대로 넣어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하실 온도는 사계절 내내 섭씨 10도 안팎을 유지한다. 이것이 서구 양조 업계에서 맥주 본연의 맛을 가장 잘 살린다고 보는 '셀러 온도(cellar temperature)'의 실체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영국의 전통 맥주인 캐스크 에일(cask ale)은 살아있는 효모가 통 안에서 2차 발효를 이어가는 맥주다. 영국 펍들은 이 맥주를 섭씨 10~13도의 셀러 온도에서 제공한다. 미국 여행객들이 "맥주가 미지근하다"고 불평하는 장면은 영국 펍에서 흔히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반면 영국 양조업자들은 미국인들이 맥주를 너무 차갑게 마셔서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고 여긴다. 벨기에·체코·오스트리아도 셀러 온도 맥주를 선호하는 나라들이다. 벨기에의 람빅(lambic) 맥주는 야생 효모를 이용해 최소 수개월에서 수년간 오크통에서 숙성·발효시키는 방식으로 만든다. 이 야생 효모는 지나치게 낮은 온도에 노출되면 활동을 멈추거나 사멸한다. 맥주를 냉장고에 넣는 순간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되어 가던 2차 발효의 궤적이 끊기는 것이다.
독일에는 맥주를 데워 마시는 전통까지 존재한다. '비어스타헬른(Bierstacheln)'은 섭씨 600도 이상으로 달군 쇳대를 맥주잔에 4~5초 담가 맥주를 데우는 방식이다. 4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바이에른 지역의 대장장이들이 겨울에 너무 차가운 맥주를 마시기 위해 고안했다는 것이 독일 최고령 양조장 바이엔슈테판(Weihenstephan)의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맥주의 잔류 맥아당이 캐러멜화되며 토피·캐러멜·초콜릿 같은 풍미가 더해진다. 겨울철 체코 프라하나 독일 바이에른의 맥주 바에서는 비어워머(Bierwärmer)라는 금속 원통에 뜨거운 물을 채워 맥주잔에 담가 온도를 높이는 도구도 쓰인다. 더 따뜻하게 마시려는 손님들을 위한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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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전문가들이 온도를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의 신체 구조와 연결된다. 미국 주류 전문 매체 와인 인수지애스트(Wine Enthusiast)에 따르면 미각 세포가 맛 성분을 가장 예민하게 인지하는 최적 온도는 섭씨 22~37도 사이다. 4도짜리 맥주가 혀에 닿으면 미각 세포가 일시적으로 마비 상태에 빠지고, 뇌는 맥주 본연의 맛 대신 차가운 온도 자극과 탄산의 청량감만을 인식하게 된다. 홉의 향과 효모가 만든 과일 향(에스테르)은 온도가 낮으면 액체 분자 사이에 갇혀 발산되지 않다가 온도가 올라갈수록 공기 중으로 피어오른다.
맥주 전문 사이트 드링크카운트르(Drinkcountr)는 "얼음처럼 차갑게 마시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마케팅"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맥주를 얼음처럼 차갑게 마시는 마케팅은 미국 대형 맥주 기업들이 주로 벌였다. 쿠어스, ·버드와이저, 밀러 같은 미국의 주류 라거들은 보리 맥아 비율을 낮추는 대신 쌀이나 옥수수 같은 부재료를 대량 투입해 생산된다. 가볍고 청량한 것이 장점이지만, 온도가 올라가면 부재료 특유의 잡미와 양조 과정의 결함이 드러나는 단점이 있다. 쿠어스는 캔 표면에 특수 감온 잉크를 적용해 섭씨 4도 이하로 떨어지면 산 모양 그래픽이 파란색으로 변하는 패키지를 만들었고, "가장 차가울 때가 가장 완벽한 순간"이라고 홍보했다. 맥주의 풍미 결함을 낮은 온도로 덮어버리는 전략이었던 셈이다.
한국·일본·동남아시아의 맥주 문화는 이 미국식 기조의 영향권 안에 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독일 양조 기술을 들여와 근대 맥주 산업을 시작했지만, 이후 아사히·기린 등 대형 기업들이 시장을 주도하면서 냉동 잔에 거품을 가득 채운 극저온 맥주를 세일즈 포인트로 삼았다. 동남아시아에서는 타이거, 싱하 같은 가벼운 라거에 얼음을 직접 넣어 마시는 문화까지 생겨났다. 반면 중국은 다른 흐름을 보인다. 쿠어스가 중국 시장에 진출할 당시 감온 잉크의 작동 온도를 미국 기준보다 높게 재조정해야 했다. 차가운 음료가 위장을 해친다는 전통적인 인식 때문에 중국에서는 지금도 맥주를 상온에서 마시는 문화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맥주 전문가들이 권고하는 스타일별 최적 음용 온도는 명확하게 구분된다. 미국식 라이트 라거나 멕시칸 라거는 0~4도, 독일식 바이젠이나 체코·독일 필스너는 4~7도, 벨기에 에일이나 스타우트·포터는 7~13도, 영국식 캐스크 에일이나 IPA는 10~14도, 임페리얼 스타우트나 발리 와인 같은 고도수 에일은 14~18도가 적합하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맥주를 잔에 따른 뒤 10분만 기다려보면 온도가 올라가며 풍미가 살아나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적어도 맥주 전문가들의 관점에서는 맥주를 무조건 차갑게 마시는 것이 정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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