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청동 뚜껑 위 산봉우리 사이로 피어오른 연무는 현실의 산보다 신선이 산다는 세계를 닮았다. 평양 석암리 9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박산로는 낙랑 상층 사회가 받아들인 한나라 문화와 불사 관념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기원후 1세기경 조성된 석암리 9호 무덤에서는 금, 은, 청동, 철, 칠, 옥, 유리 등 다양한 재료의 부장품이 나왔다. 큰 덧널 안 오른쪽 아래에는 시신을 안치한 널이 있었다. 주변에는 용도와 재질별 부장품이 놓였다. 죽은 뒤에도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길 바란 무덤 주인의 사후관이 드러난다.
청동 용기는 덧널 북쪽 벽 가까이에 일렬로 놓였다. 고기를 담는 정(鼎), 술을 담는 호(壺), 한대 새로 등장한 준(樽)과 종(鍾)까지 확인된다. 상주시대부터 한나라에 걸친 청동기 계통을 갖춘 점은 무덤 주인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음을 말한다. 청동기열 가장 왼쪽에는 박산로가 자리했다. 석암리 9호분 청동박산로는 받침대, 기둥, 향로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받침대 위에는 기둥이 서고, 꼭대기에는 향을 피우는 향로가 얹혔다. 향로 몸체와 뚜껑은 튀어나온 지도리로 연결돼 열고 닫을 수 있게 설계됐다.
뚜껑은 산 모양이다. 여러 겹 봉우리와 정상부를 표현했다. 산 아래에는 열쇠 구멍 모양과 둥근 구멍 9개가 뚫렸다. 산봉우리 뒤쪽에도 얇고 긴 구멍 6개가 마련됐다. 향을 피우면 연기가 틈 사이로 올라와 산속 안개처럼 퍼졌을 것이다. 향로를 받치는 기둥은 봉황 형상이다. 날개와 꼬리를 펴고 고개를 세운 모습이다. 봉황은 하늘의 사자로 여겨졌다. 승선의 순간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로 해석됐다. 봉황 아래에는 거북이와 바다를 상징하는 둥근 접시형 받침이 있다. 산, 새, 거북, 물의 형상이 한 유물 안에서 신선 세계를 구성한다.
박산로는 향을 피우는 기구였지만, 기능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이전부터 향을 사용하는 전통이 있었다. 전국시대 이후 향로 제작이 본격화했다. 광둥성 광저우와 후난성 창사 일대에서는 전국시대 또는 전한 초기로 추정되는 토제 향로가 확인됐다. 한나라에 들어 청동 향로가 널리 제작됐다. 산 모양 뚜껑을 갖춘 박산로가 대표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한대에는 향로 또는 훈로라는 명칭이 쓰였다. 박산이라는 용어는 육조시대에 본격 사용됐다. 연대가 비교적 분명한 초기 사례로는 산시성 무릉 1호 무덤 출토 도금은죽절훈로가 꼽힌다. 한 무제 건원 4년인 기원전 137년에 황실용으로 제작했다가 양신공주에게 하사했다는 명문이 남아 있다.
허베이성 만성 1호·2호 한묘 출토품도 중요한 비교 자료다. 중산왕 유승은 기원전 113년, 부인 두관은 기원전 102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전한다. 양신공주, 유승, 두관 관련 유물은 박산로 발생과 유행이 전한 중기, 특히 한 무제 시기와 깊이 관련됐음을 알려준다. 박산로가 산을 형상화한 배경에는 불사와 신선설이 있다. 전국시대 후기 이후 사람들은 지상에서 오래 사는 장생을 꿈꾸는 데서 나아가, 신선이 되어 다른 세계에서 영생을 누리려 했다. 진 시황제의 강압적 통치 이후 서한 초기 사회에는 노자 무위철학에 뿌리를 둔 황로도가사상도 널리 퍼졌다.
한 무제는 불사를 갈망한 군주였다. 불사약을 구하려 사람을 보냈다. 신선을 불러들이려 방사에게 관직을 내렸다. 동중서 사상까지 받아들이며 하늘과 인간이 서로 감응한다는 관념도 강화됐다. 비슷한 성질의 존재가 서로 움직인다는 동류상동 사상은 신선 세계를 본뜬 형상 제작을 자극했다. 박산로는 신선이 머문다는 산을 향로 위에 세운 물건이었다. 한나라 신선설 유행은 박산로의 확산을 낳았다. 한 제국의 영토 확장 속에서 박산로는 중원뿐 아니라 광시성, 랴오닝성, 산시성, 한반도 낙랑군에서도 확인된다. 낙랑군에서는 석암리 9호 무덤 외에도 석암리 219호 무덤, 정백동 88호 무덤에서 청동박산로가 나왔고, 남정리 53호 무덤에서는 도제 박산로가 출토됐다.
석암리 9호분 박산로는 산과 구멍 표현이 비교적 간략하다. 그러나 향연기가 산봉우리 사이에서 피어나는 효과만큼은 충분히 의도됐다. 향을 태우는 순간 청동 산은 안개 낀 선계로 바뀌었을 것이다. 무덤 속 의례 공간에서 박산로는 죽은 자가 향하는 세계를 시각화하는 장치였다고 볼 수 있다. 거북 형상도 의미가 깊다. 초사, 천문, 열자, 회남자, 지형훈 등에서는 거북이 무너진 하늘을 받치거나 바다 위 신산을 떠받치는 존재로 묘사된다. 석암리 박산로의 거북 받침은 신산을 지탱하는 우주론적 존재에 가깝다.
중원 지역 박산향로는 다리 부분에 용무늬를 투조하거나 금·은 상감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사례가 많다. 반면 석암리 9호분 박산로처럼 봉황과 거북이 산을 받치는 형식은 허베이성·산시성 등 중원 주변부에서 자주 확인된다. 산시성 숴현 출토품과의 유사성도 알려져 있다. 비교 범위는 북방 초원문화까지 넓어진다. 내몽골 아먼치르거 아로시등 흉노 무덤에서는 독수리 모양 금관 장식이 출토됐다. 시기 차이가 커 직접 연관성을 말하긴 어렵지만, 목을 세우고 두 발을 딛고 날개를 편 전체 형상과 깃털 표현은 석암리 박산로의 봉황과 닮았다. 한대 청동박산로가 다양한 조형 배경 속에서 제작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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