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뮤지션들끼리 페스티벌을 멋있게 만드는 것도, 자기가 전부 프로듀싱을 하는 것도, 일기장보다 더 솔직한 가사를 쓰는 것도,
그래서 공감받는 것도 전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내가 본 가장 멋있는 록은 전부 여자들이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어쩌면 나도 따라가볼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아주 소중한 씨앗이었다.”
1997년, 여성들만의 록 페스티벌 ‘릴리스 페어(Lilith Fair)’를 보며 심어둔 열여섯 지은의 씨앗이 2026년, 첫 잎을 틔운다.
잎의 이름은 ‘영희’. 내가, 우리(여성)가 디폴트인 페스티벌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뮤지션 오지은이 ‘영희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소망을 현실로 이뤄내기까지, 기획자 오지은의 이야기를 들었다.
영희, 영화로운 영(榮) 기쁠 희(喜). Glory & Joy. 우리가 교과서에서 처음 보는 여성의 이름. 잊혀진 이름.
철수만큼 영광을 누리지 못한 이름. 어떤 엄마의 이름. 그 이름을 우리가 가져와서 영광과 기쁨을 바칠 수 있다면?
예술가도 향유자도 커다란 기쁨과 영광으로 한을 소멸시킬 수 있다면?
이건 1990년대에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한 여자의 이야기다.
음악을 좋아했다. 저녁에는 라디오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아메리칸 탑 40’ 코너를 제일 열심히 들었다. 그 주의 빌보드 차트에 오른 음악을 40위부터 역순으로 들려주는 시간이었다. 그린 데이의 펑크도, 머라이어 캐리의 발라드도, 스매싱 펌킨스의 무지막지한 두 장짜리 앨범의 타이틀도, 차트에 오르면 틀어주었다. 1995년이었고,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차트는 잔혹하지만 가끔 좋은 지점이 있다. 인기가 있으면 무슨 장르든 상관없이, 아무 맥락 없이 나란히 놓인다는 점이다. 그건 마치 뷔페 같다. 랍스터도, 동치미도 그냥 한 코너에 놓일 뿐이다. 그리고 대중은 의외로 상당한 미식가여서 맛없는 건 먹지 않는다. 나는 접시를 들고 게걸스럽게 1995년의 뷔페를 탐닉했다. 취향이나 계보 따윈 상관없었다. ‘너무 좋은데!’ 싶으면 CD를 샀다. 마르고 닳도록 들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음악은 마르지도 닳지도 않는다. 듣는 사람이 내려놓을 뿐. 뷔페에서 접시를 계속 바꿨는데, 그때마다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음악이 담겼다는 사실은 당시엔 미처 깨닫지 못했다.
1990년대 미국 음악계는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전성기였다. 이 얘기는 길게 하면 재미없으니 짧게 하겠다. 좋은 곡이 많이 나왔고, 사람들은 열광했고, 상도 많이 받았다. 예를 들어 앨라니스 모리셋의 전설의 첫 앨범은 세계적으로 3천3백만 장이 팔렸다. 3백30만 장이 아니다. 나는 앨라니스 모리셋이 쓴 가사에 쇼크를 받았다. 창법도, 솔직함도, 에너지도, 그런 걸 따지고 드는 게 의미가 없을 만큼 저 벌거벗은 여자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건 좋은 음악을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인간의 이상함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 그건 아마도 동경을 넘어서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긍정받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비틀스는 신이었지만 나에게 그걸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매달 용돈으로 사던 잡지 <핫뮤직>에서 한 기사를 보았다. 사라 맥라클란이 주축이 되어서 여성 뮤지션만 나오는 페스티벌을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난 그 기사를 아주 천천히 읽었다. 탐닉하듯. 이름은 ‘릴리스 페어(Lilith Fair)’였다. 릴리스는 신화에 나오는 여성인데 아담의 첫 번째 아내였으나 그에게 복종하지 않아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존재라고 한다.
사라 맥라클란은 당시 ‘Angel’이라는 노래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빌보드에는 4위까지 올랐다. (차트 얘기를 자꾸 하는 건 이들이 마니악한 인기만 끈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런 그가 왜 이런 페스티벌을 만들었을까. 온갖 페스티벌이 그를 불렀을 텐데.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라디오 방송에서 여성 뮤지션을 연달아 출연시키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고 결심했다고 한다. 웃기다. 아니, 사실 전혀 웃기지 않다. 그건 내가 겪은 일이니까. 릴리스 페어는 굉장했다. 흥행도 엄청났다. 나는 출연진 이름을 보며 감탄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계속 나오는 이런 페스티벌도 있을 수 있구나. 셰릴 크로는 물론, 피오나 애플, 수전 베가, 시네이드 오코너 등 전설들이 줄줄이 나왔다. 언젠가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어릴 때 본 것은 특별한 무언가를 남긴다. 1990년대의 이런 흐름은 내 무의식 안에서 표준이 되었다. 이렇게 음악을 하면 되는구나. 그럼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구나.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모이는구나. 여성 뮤지션끼리 페스티벌을 멋있게 만드는 것도, 자기가 전부 프로듀싱을 하는 것도, 일기장보다 더 솔직한 가사를 쓰는 것도, 그래서 공감받는 것도 전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내가 본 가장 멋있는 록은 전부 여자들이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어쩌면 나도 따라가볼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아주 소중한 씨앗이었다.
20대가 되고 어찌어찌 음악인이 되었다. 공연을 하고 1집을 냈다. 내가 어떻게 보일지, 어떤 식으로 읽힐지에 대한 생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앨범을 낸 다음의 상황은 복잡해졌다. 그때가 2000년대 중반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홍대 여신이니 홍대 마녀니 하는 말로 빠르게 라벨링을 당했다. 그 덕을 보지 않았냐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난 음악의 본질과 상관없는 이야기의 소모성을 말하고 싶다. 화제성이 있는 것과 제대로 된 명예를 얻는 것은 다른 일이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편견 때문에 내 음악을 늦게 접했다고 고백했다. 의외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럼 무엇을 기준으로 의외라는 것인가.
시간이 지나 작가가 되고 출판계의 상황을 조금 알게 되었다. 출판계는 바뀌었다. 젊은작가상은 매년 10명의 작가를 뽑는다. 이제는 전부 여성이 뽑혀도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다. 독자가 거의 여성이니까, 편집자도 거의 여성이고, 작가도 거의 여성인 건 당연하지 않아? 이런 흐름이다. 하지만 공연계는 바뀌지 않았다. 인디 음악 공연의 관객은 거의 여성이다. 음악을 하는 여성도 많다. 그런데 페스티벌 라인업의 성비를 따져보면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9:1 정도다. (간혹 남성 비율이 더 많을 때도 있다) 이럴 때 여성 뮤지션들은 ‘내가 음악을 못하고 인기가 없어서’라고 생각할 것 같다. 내가 그랬으니까. 개인에게 한두 번 벌어진 일이라면 특이한 에피소드다. 하지만 비슷한 일이 타인에게도 1백 번 넘게 일어난다면 그것은 경향이다. 후배들이 묘한 차별을 느끼고 화살을 자신에게 돌릴 때 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네가 예민하거나 이상한 게 아니야. 사회가 이런 거야.
이런 불평쟁이지만 감사하게도 많은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했다. 페스티벌은 옆 스테이지에서 사운드 간섭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나도 무기를 총동원했다. 쎄게, 크게, 서서 보는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난 앉아서 섬세하게 하는 음악을 제일 잘하는데, 나는 누구의 디폴트를 맞추고 있는 것이지. 내가, 우리가 디폴트인 페스티벌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너무 큰 꿈이었다. 어느새 나는 40대 중반이 되었다.
후배라고 부르던 뮤지션들이 거장이 되는 건 멋진 일이다. 김사월, 이랑, 안다영 등. 그들은 멋진 호랑이가 되었다. 선배들은 이미 신이다. 김윤아, 이소라, 이상은, 조원선…. 그럼 양쪽의 번호를 아는 내가 설마 만드는 역할인가? 계기는 이상한 타이밍에 찾아왔다. 홍대의 한 공연장에서 단독 공연 제안을 받고 회의를 하다가 잠시 수다를 떨었다. “여자 뮤지션만 주르르 나오는 페스티벌을 언젠가 만들고 싶은데 아직 조금 먼 얘기겠죠.” 담당자 주란이 말했다. “저희랑 해보시죠.” 그렇게 ‘영희 페스티벌’이 시작되었다.
처음 리스트를 만들 때 느낀 흥분이 기억난다. 타임테이블 비슷한 것을 만들었을 때의 흥분도 기억이 난다. 이 사람들을 이 순서로 볼 수 있다고? 엄청난 도파민이 솟았다. 가까운 사람들을 먼저 섭외했다. 모두가 이 페스티벌을 반겼다. 동시에 아직 고생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하게 될 고생을 걱정했다. 다들 아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그리고 어떤 가치를 지키고 싶어 하는지를. 누군가 말했다. “이상하죠. 이 공연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얘기를 다 듣고 나니 내가 바로 이런 공연을 원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어른의 사정으로 장소를 마포아트센터로 옮기게 되었다. 인큐베이팅을 함께 해준 주란에게 많이 고맙다. 전화번호를 건네받아 더 많은 뮤지션들과 통화를 했다. 어떤 선배는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말했다. “지은 씨, 할게요.” 어떤 선배는 그냥 거절하면 되는데 40분이나 통화를 해주었다. “네가 이렇게 큰일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그냥 못 한다고만 하니.” 정신 차려보니 엄청난 라인업이 꾸려져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라인업이구나. “이 사람이 나온다고요? 저도 할게요.” 서로가 서로의 팬이었다. 그런데 만날 일이 없었다. 그것도 신기하지?
티켓 오픈을 해야 하는데 페스티벌 이름이 아직 없었다. 보통 이럴 때 떠올리는 신화 속 이름이나 뮤즈 같은 개념은 쓰기 싫었다. 다른 사람과 관계가 생겨야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 그냥 개인으로서의 이름을 쓰고 싶었다. 영미권의 제인(Jane) 같은 우리의 최초의 여성 이름이 뭐지? 강아지와 산책을 하다 이랑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렇다고 영희 페스티벌이라고 할 순 없잖아.’ 바로 답이 왔다. ‘영희? 나는 좋은데?’ 그때부터 생각이 빠르게 흘러갔다. 영희, 영화로울 영(榮) 기쁠 희(喜). Glory & Joy. 우리가 교과서에서 처음 보는 여성의 이름. 잊혀진 이름. 철수만큼 영광을 누리지 못한 이름. 어떤 엄마의 이름. 그 이름을 우리가 가져와서 영광과 기쁨을 바칠 수 있다면? 예술가도 향유자도 커다란 기쁨과 영광으로 한을 소멸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3일간 3개의 스테이지에서 하는 페스티벌의 라인업이 꾸려졌다. 1차로 음악 라인업을 공개했더니 반응이 컸다. 어떻게 이 사람들을 다 모았느냐는 말이 제일 많았다. “제가 모은 것이 아니고 이분들이 모여주신 거예요. 저는 그냥 다정하고 즐거운 통화를 했을 뿐입니다.” 진심이었다.
이 원고를 쓰는 지금은 정식 티켓을 오픈하기 며칠 전이다. 블라인드 티켓은 빠르게 매진되었지만 진짜 세상의 반응은 다를 수도 있다. 여자 뮤지션이 돈이 안 된다는 말을 하던 사람들이 “역시 그렇잖아?” 하고 씩 웃을 수도 있다. 여자 뮤지션들은 화제성만 있지, 실제로 그들에게 돈을 쓰는 사람은 적다고 비아냥댈 수도 있다. 뮤지션으로서 내가 생존하는 것은 어떤 증명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턱없이 모자란 증거다. 그렇다면 기다릴 뿐이다. 그 말이 틀렸다고 밝혀질 때를 기다릴 뿐이다. 나는 계속 살아갈 것이고 영희들도 살아 있을 테니까.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말이 떠올랐다. “대법관 중 여성이 몇 명이어야 충분하냐”는 질문에 그는 “전부”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대법관이 전부 남자일 때는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죠?” 내가 좋아하는 일화다. 영희 페스티벌이라는 존재가 너무 당연해져서 누군가 다른 여성이 “영희페는 너무 구려. 나라면 그렇게 안 만들어”라고 말하는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 내가 가장 바라는 순간이다. 부숴야 하는 디폴트가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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