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침묵한 친족 성범죄 피해자가 소멸시효의 벽에 부딪혔다. / AI 생성 이미지
친족에게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가 10년 넘는 침묵을 깨고 법의 문을 두드렸지만, '소멸시효'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혔다.
가족에게 피해를 호소해도 “네 문제”라며 외면당했던 시간. 형사 처벌이 불가능해진 지금, 마지막 희망인 민사상 손해배상마저 3년의 시효에 발목 잡힐 위기다.
과연 법원은 트라우마로 얼룩진 그녀의 시간을 '소멸시효 완성'이라는 말로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상처가 곪아 터진 지금을 새로운 시작으로 인정할 것인가.
“그만 말하라”…가족의 외면이 만든 10년의 지옥
A씨에게 가족은 가장 안전한 울타리가 아니었다. 친족으로부터 성범죄 피해를 입은 후 고통을 호소했지만, 돌아온 것은 “네 문제다”, “병원을 왜 안 가냐”, “그만 말하라”는 차가운 말뿐이었다.
가족들은 오히려 가해자인 친부와의 화해를 종용했고, 원치 않는 만남을 지속시켰다.
A씨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 여기며 상처를 안으로만 삭였다. 하지만 노력해도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2024년이 되어서야 A씨는 더는 혼자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용기를 내 1366에 익명 상담을 요청하고 성폭력상담소의 문을 두드리며 처음으로 자신의 피해를 공식적으로 외부에 알리기 시작했다.
'손해를 안 날' 3년의 덫…엇갈리는 변호사들의 시선
A씨의 발목을 잡는 것은 민법 제766조의 소멸시효 규정이다.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는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내에 해야 한다.
A씨는 법적 구제 절차를 알아보기 시작한 2024년을 '손해를 안 날'로 주장하고 싶지만, 법조계의 시선은 엇갈린다.
김상윤 변호사는 비관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일반적으로 법원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을 법률적 평가나 소송 가능성을 알게 된 시점으로 보지 않고, 누가 어떤 행위를 했고 그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관계를 인식한 시점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따라서 과거 가족에게 피해를 호소했고, 친부가 가해자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면, 최근 상담 개시 시점을 기준으로 새롭게 시효가 진행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조기현 변호사 역시 A씨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느냐는 질문에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판례는 피해자 편…'PTSD 진단서'가 뒤집을 마지막 희망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길은 있다. 최근 법원은 성범죄 피해의 특수성을 깊이 고려하고 있다.
특히 대법원은 성범죄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뒤늦게 나타나는 경우, 전문가의 진단을 받기 전에 손해가 현실화되었다고 단정하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대법원 2021. 8. 19. 선고 2019다297137 판결).
즉, 과거의 성범죄가 현재의 정신적 고통을 유발했다는 '인과관계'를 의학적으로 증명한다면, 진단을 받은 시점을 새로운 시효의 시작점으로 주장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종득 변호사는 “당시 연령·트라우마 등으로 요건사실(특히 '현재의 정신적 손해가 그 성범죄로 인해 발생했다'는 인과관계)을 현실적으로 인식할 정신적·인지적 조건이 부족했고, 2024~2025년에 이르러 진단/상담 등을 통해 비로소 인과관계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정이 객관자료로 뒷받침되면, 그 무렵을 기산점으로 주장해 볼 여지는 있습니다”라고 조언했다.
결국 지금이라도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통해 피해 사실과 현재의 트라우마 사이의 연결고리를 '객관적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시효의 벽을 넘기 위한 마지막 열쇠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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