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노규민 기자] 우리 할머니들은 "제발 그런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다그쳐도 "늙으면 죽어야지"를 입에 달고 산다. 사랑, 꿈 자신의 이름까지 잃은 채 그저 남편, 아들, 딸, 손자, 손녀에 헌신하며 살아왔다. 오로지 '남'을 위해 살다, 그저 그렇게 세상을 떠나겠다고 한다. 그런 '당신'들에게 전하는 한마디 '가시나'. 80줄,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다. '설렘'을 다시 느낄 시간이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과 에세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을 원작으로 한 실화 기반 창작 뮤지컬이다. 늦은 나이에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할머니들의 인생 예찬극으로, 실제 문해학교 할머니 학생들의 시 20여 편이 서정적인 뮤지컬 넘버로 재탄생 했다.
뉴스컬처는 지난 6일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 하늘극장에 서 펼쳐진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2시 공연을 찾았다. 극장 주변은 공연 시작 1시간 전부터 2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 관객으로 북적였다.
특히 제작사에서 마련한 포토존이 인기였다. 교복 모형 판넬을 들고 기념 촬영하는 노년의 엄마와 중년의 딸, 미리 나눠 준 야광봉을 들고 소녀처럼 웃으며 사진 찍는 중년, 노년 관객들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또 그 어떤 극 보다 가족 단위 관객이 여럿 눈에 띄었다. 손자·손녀부터 할머니까지 상기된 표정으로 공연을 기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포토존 옆으로는 실제 문해학교 할머니들이 직접 쓴 시들이 전시 돼 있었다. 공연 관람 전, 귀엽게 쓰인 시들을 눈에 담는 관객들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와 함께 '백일장 대회' 이벤트도 진행됐다. 관객이 자유롭게 시를 써서 응모함에 넣으면 추첨을 통해 소정의 선물을 제공하는 행사였다.
관객들이 무대를 품고 있는 듯 한 반원형의 하늘극장 내부가 어느새 꽉 들어찼다. 이날 무대에는 김아영, 차청화, 김미려, 이예지, 장민수, 하은주가 올랐다.
첫사랑이 읊어준 시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온 '인순'(김미려)의 이야기부터 가수의 꿈을 잊지 못해 노래자랑에 도전하는 '춘심'(차청화),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손자가 내민 동화책을 피해 부엌으로 숨어야 했던 '영란'(김아영), 아들을 낳지 못해 분하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 부끄러웠던 '분한'(이예지)까지, 실존 인물의 사연이 녹아 있는 에피소드가 이어지며 짙은 감동과 묵직한 울림을 안겼다.
여기에 극의 대표 넘버 '우리는 가시나'부터 '첫사랑' '노래자랑' '내 꿈은 가수' '화상' '닭' '엄마 시(詩)' '내 마음' '호랭이가 물어갈 년' '내 이름 이분한'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등 때론 뭉클하고 때론 신명나는 노래와 춤이 짜임새 있는 호흡으로 펼쳐져 흥미를 높였다.
할머니들이 살아온 인생과 그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사랑, 꿈, 말 못했던 사연들이 노래와 춤, 연기로 섬세하게 그려지는 동안 객석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네 인생'에 공감한 관객들이 시종 함께 웃고 울었다.
작품은 여자아이를 뜻하는 방언 '가시나'를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로 재해석에 배움에는 때가 없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노년의 애환에 그치지 않고 배움과 성장을 그려낸 이야기는 중장년층에게 깊은 공감을 자아내며, 젊은 층에게는 부모님 세대를 이해하고 닮고 싶은 노년의 모델을 발견하는 통로가 된다.
극은 배우들의 맛깔나는 연기로 완성도를 높였다. 대학로 연기파 배우 김아영의 시원시원한 발성, 허스키한 보이스의 노래는 절로 박수를 유발한다. 또 초연 멤버 이예지의 안정적인 연기가 극의 몰입도를 끌어 올린다. 이번 시즌 새롭게 합류한 차청화와 김미려의 열연도 눈부시다. 특유의 센스로 사투리와 코미디 연기를 맛깔나게 소화한다.
공연이 끝난 후, 싱어롱 커튼콜데이가 이어졌다. 공연에 흠뻑 빠진 관객들과 배우들이 하나가 되어 '화상'을 함께 불렀다. 누군가에게 쌓인 게 많은 듯, 한 관객은 목이 떠나가라 "화상" "화상"이라고 소리쳤다.
러닝타임은 길지 않다. 웃다 울다보면 80분이 훌쩍 지나간다.
뉴스컬처 노규민 pressgm@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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