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내전으로 EDCF '의과대학 병원'은 좌초…'100% 후원금'으로 건립
맹장염도 치명적인 남수단서 '응급 외과 수술' 특화…현지 정부도 화답
(서울=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의 배경인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 지역의 척박한 땅에 고(故) 이태석 신부의 정신을 잇는 또 하나의 의료 거점이 오는 8월 말 세워진다.
정부 차원의 공적개발원조(ODA) 프로젝트가 현지 내전 등으로 10년 넘게 중단된 사이, 재미동포들로 구성된 민간 단체가 자발적인 모금에 나서면서 외과 수술 전문 병원 건립을 목전에 두게 됐다.
대한민국과 남수단은 올해 수교 15주년을 맞았지만. 양국 간 공식적인 대규모 보건·의료 협력은 사실상 멈춰 서 있었다.
과거 정부가 한국수출입은행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유상 차관 방식으로 수도 주바에 건립을 추진한 650병상 규모의 '이태석 기념 의과대학병원' 사업은 내전 발발 이후 중단됐다.
이후 상주 대사관 개설조차 지연되는 등 외교·행정적 공백이 길어졌다. 이 틈새를 메운 것은 이 신부의 유산을 가슴에 품은 동포사회의 묵묵한 행보였다.
◇ 맹장염에 죽어가는 이웃들… 제자 의사가 띄운 '구조 신호'
톤즈 현지에는 이 신부의 뜻을 이어받아 살레시오 수도회가 운영해 온 '돈보스코 병원'이 지난 20여년간 일차 보건 의료의 거점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기본적인 진료를 넘어선 전문적인 외과 수술 시설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맹장염 등 간단한 응급 수술조차 받지 못해 환자들이 사망하는 사례가 이어지자, 이 신부의 제자인 현지인 의사 아롭 가랑은 한국의 후원자들에게 절박한 구조 신호를 보냈다.
이에 응답해 건립되는 외과 수술 전문 '이태석 기념 톤즈 희망 병원'은 기존 돈보스코 병원과 긴밀히 연계해 '진료-수술-재활'로 이어지는 의료 서비스의 사각지대를 메울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이 병원 건립 프로젝트는 이 신부의 헌신을 이어가야 한다는 재미동포들의 뜻을 모아 미주아프리카희망후원회(CFACM·이사장 이인석)가 남수단이태석기념재단(이사장 김기춘), 현지 의료진과 협력해 진행하고 있다.
한국 측에서 현지 당국과 조율을 도맡은 김기춘 이사장은 16년째 홀로 남수단에 상주하며 봉사해 왔다. 이번 프로젝트의 실무와 현지 행정 지원을 총괄하고 있다.
당초 대학 졸업 후 대형 건설사를 거쳐 중동과 미국 등에서 활동한 사업가였던 김 이사장은 2003년 수단 하르툼에서 건축 자재를 구하러 온 이 신부와 식사한 것이 인연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2010년 이 신부의 선종 소식에 큰 부채감을 느꼈다.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영구 이주하기 전 마지막으로 톤즈를 찾은 그는 굳게 닫힌 흙담 병원 앞에서 오열했다.
"신부님이 떠난 후 한국에서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현지인들의 말에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남수단한인회장이자 영사협력원으로 지금까지 봉사하고 있다.
◇ 미국 동포사회가 뭉쳤다…매달 십시일반 모은 성금 쾌척
김 이사장과 현지 제자들의 간절한 호소에 응답한 곳은 미주아프리카희망후원회였다. 재미동포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이곳은 2020년부터 남수단 주바 의대생 23명에게 전액 장학금을 지원해 왔다.
이 이사장은 2024년 1월 처음으로 톤즈 땅을 밟았다. 장학생들을 면담하고 폐허가 된 병원을 마주한 그는, 말라리아나 맹장염 같은 흔한 질병에도 목숨을 잃는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이사장은 8일 연합뉴스에 "이태석 신부님이 살아계셨다면 가만히 있지 않으셨을 것"이라며 "장학생 중 한 명이 에티오피아에서 외과 과정을 마치고 2025년 톤즈의 첫 외과 의사로 돌아오는 시점에 맞춰 병원 건립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올해 2월 첫 삽을 뜬 이 병원은 재미동포 2천여명이 매달 십시일반 모은 성금으로 지어진다. 후원회는 이미 병원 앞 부지를 추가 매입해 향후 의료 장비 확충과 전문 의료진 초빙을 위한 기반도 마련했다.
김 이사장은 "8월 말 완공은 끝이 아니라 거대한 이정표의 출발점"이라며 "총공사비 20억∼30억원이 추산되는 이 병원은 맹장, 정형외과, 위장관 수술 등을 소화할 수 있는 수술 전문 병원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톤즈에는 수술실이 없어 환자들이 주바 등 대도시로 이동하다 길에서 죽는 일이 다반사"라며 "향후 미국의 은퇴한 명의들을 모셔 와 중증 환자 수술 캠프를 열 예정이며, 이태석 신부 제자들이 병원 운영을 전담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남수단 정부 감동…부지 무상 임대·의료 장비 면세 등 약속
아무런 보상 없이 고군분투한 민간의 헌신은 남수단 최고위층의 마음을 움직였다.
지난 2일 '한-아프리카 외교장관회의' 참석차 방한한 제임스 피티야 모건 남수단 외교부 장관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민간 주도의 병원 설계 도면을 확인한 뒤, 병원 부지의 영구 무상 임대와 수입 의료 장비의 관세 면제 등 지원을 약속했다.
또 민간 부문의 적극적인 노력은 멈춰 있던 정부 간 외교 관계의 재정상화를 위한 물꼬를 틀 것으로 전망된다.
남수단을 겸임하는 주우간다 한국대사관의 이상호 대사가 현지에 부임한 뒤 신임장 제정을 위해 주바를 방문할 때,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 남수단 대통령이 한국 정부에 공식 친서를 직접 전달할 예정이다.
이 친서에는 국제적인 규모의 이태석 추모 병원 건설을 염원하며, 10년 넘게 중단됐던 EDCF 의료 ODA 사업의 전면 재개를 한국 정부에 요청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이태석 신부의 정신을 이어 남수단의 실질적인 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해 추진된 민간 병원 건립이 한국과 남수단 정부 간 교류 확대와 대형 프로젝트로 확대될지 주목된다.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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