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미발표 9편 등 시 42편·산문 3편
김민정 시인 "사망신고 해결하고, 고향에 '허수경 나무' 심을 것"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상냥한 벗인 취기에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아, 당신을 기다리면서 물들면서/ 나는 이 세상 속, 어떤 예쁜 사람이 되어/ 사라져간다"('공항에서' 중)
맑은 슬픔과 그리움, 고독의 미학으로 한국 시단에 깊고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긴 허수경(1964∼2018) 시인의 유고시집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이 난다시편으로 출간됐다.
2018년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8년 만에 나온 유고 시집으로, 42편의 시와 3편의 산문이 담겼다.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라고 출판사는 설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인의 생일(6월 9일)을 맞아 시집이 출간된 데는 사연이 있다.
이번 시집은 그의 절친한 후배 시인이자 법적 대리인인 출판사 난다의 김민정 대표가 고르고 엮었다.
김 대표는 지난 7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언니(허 시인)는 생전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노트북 등에 작품을 정리해 왔다"며 "장례 후 이를 전달받아 정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난다에서는 '가기 전에 쓰는 글들', '오늘의 착각',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 등 시와 산문을 포함해 세 권의 유고집을 펴냈으며, 이번 유고 시집은 당초 시인의 기일(10월 3일)에 출간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지난해 한국에 있는 시인의 유족을 통해 아직 그의 사망 신고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독일에 있는 허 시인의 남편이 한국에 보낸 관련 서류가 사본이라 행정 처리에 문제가 있었고, 남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이를 처리할 여력도 없었던 탓이다.
김 대표는 "어떻게든 언니를 좀 편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출간 시기를 앞당겼다"며 조만간 사망 신고 문제도 해결하고, 기일에는 그의 고향에 '허수경 나무'도 심을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인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은 허 시인이 남편을 생각하며 쓴 시다.
"가끔 생각하지,/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나는 구십이 넘어 연가 한 편을 꼭 쓸 거라고//(중략) 나를 일으켜주던 간병인은 말할지도 몰라/ 오늘 얼굴 환하세요 꼭 새색시, 같으세요/ 나는 웃으며 대답하겠지// 오늘은 구십 년 동안 기다려온 연가를 쓰는 날이라오"
자신이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이 연가를 썼던 시인은 정작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됐다.
이번 시집에도 유랑과 그리움,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연민과 사랑을 다룬 시편들로 가득하다. 수록작 가운데는 미발표 시도 있다.
'하튜사 연가', '사과는 떨어지고', '시 번역, '그녀가 들려주는 시', '잎새라는 이름', '포도주 한 병', '그해 봄밤에 나는 십 년 넘어 가지 못한 아버지의 무덤을 생각했네', '꽃 지는 날', '진주라는 곳' 등 9편은 지금껏 어떤 지면에도 공개되지 않은 작품이다.
김 대표는 "발표한 시들 중에 제가 뺀 것도 있고, 발표하지 않은 시들 중에 뺀 것도 있었다"며 "최대한 '허민정·김수경'이 되어 긴장을 가지려 노력했던 듯하다"고 책을 엮은 소감을 말했다.
허수경은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1987년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92년 한국을 떠나 독일 유학길에 올랐으며, 독일에서도 꾸준히 시작 활동을 이어가다 2018년 10월 3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고 시집 출간을 맞아 인터넷서점 알라딘에는 온라인 추모 공간도 마련됐다.
김혜순 시인은 "남성민중문학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가족 민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여성성으로의 연대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 오직 당신만의 이야기를 위해, 살아서 죽음을 추억하기 위해, 떠남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나고 바리공주처럼"이라고 추모 글을 남겼다.
128쪽.
kih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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