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뽑은 최고의 엔지니어 자부심…미국서 M16 제조 기술 배워"
부산 조병창서 국산 1호 소총 생산…"공정관리 기술이 K방산 밑바탕"
(부산=연합뉴스) 차근호 기자 = "그때는 비행기 한 번 타는 것도 과거 급제하는 것 같은 일이었습니다."
현충일을 하루 앞둔 지난 5일 부산에서 만난 강흥림(87)씨는 50여년 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순간을 이렇게 떠올렸다.
1972년 그는 동료 기술자들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이들의 임무는 미국 총기 제작사 '콜트'사에서 'M16' 소총 제조 기술을 배워와 국내 생산 체계를 갖추는 것이었다.
강 씨를 포함한 27명은 훗날 '한국 방위산업 1세대'로 불리게 되는 '도미(渡美)기사단'이다.
강 씨는 "우리는 정부가 뽑은 최고의 엔지니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며 "이걸 못 만들면 안 된다, 반드시 성공시켜야 대한민국이 제대로 선다는 생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말했다.
당시 '도미기사단'이 등장한 배경에는 1960년대 후반의 엄중한 안보 상황이 있었다.
1968년 김신조 등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고, 같은 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도 발생했다.
북한의 대남 도발이 이어지는 가운데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군사 개입을 줄이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주한미군 제7사단이 철수했고, 정부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했지만 정작 예비군에게 지급할 기본 무기조차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소총 한 자루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우리 국방 기술에 대한 문제의식은 커져만 갔다.
정부는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를 세워 본격 무기 연구개발에 나섰고, 1971년 말에는 긴급병기 개발 사업인 '번개사업'도 추진했다.
'M16 소총 국산화'도 같은 흐름 속에서 시작됐다.
국방부는 1971년 M16 소총 국산화를 위해 콜트사와 기술 협정을 맺었다.
부산 기장군 철마면에 무기와 탄약 등을 생산·정비하는 군수공장인 국방부 '조병창' 건설도 추진됐다.
육군본부는 1971년 11월 신문에 '국외 유학 기술 요원 모집' 공고를 냈다.
공대 기계과 졸업, 군필, 기계 분야 경력, 영어 능력 등 까다로운 조건에도 전국에서 약 1천800명이 지원했고, 이 가운데 27명이 최종 선발됐다.
한양공대를 졸업하고 당시 서울 구로구 한 자동차 스프링 제조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강씨도 이 중에 한명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무기를 만드는 기술자를 모집한다는 정도로만 알았다"면서 "비행기 한 번 타는 것도 과거급제 같았고, 전 가족이 나와서 손을 흔들어 주던 시대였기에 외국에서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사택도 준다는 말에 지원했다"고 전했다.
도미기사단이 처음 도착한 곳은 텍사스에 있는 미 국방어학원(DLI)이었다.
강 씨는 "세계 각국에서 온 공군 조종사들과 함께 3개월간 언어 연수를 받았다"며 "처음 영어 교육을 받을 때는 3분의 1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언어 연수 뒤에는 콜트사에서 본격적인 현장 교육을 받았다.
콜트사는 19세기부터 리볼버와 자동권총, 군용 소총 등을 생산해온 미국 총기 산업의 상징적 기업이다.
콜트사 연수는 일대일 현장 교육 방식이었다.
강 씨는 "온더잡 트레이닝 방식으로 현장에서 한 명씩 붙어서 배웠다"며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한국 공장에서 일하던 기술자들이었기 때문에 눈치로도 배우고, 책을 보면서도 밤새도록 익혔다"고 말했다.
도미기사단의 과제는 단순히 M16의 모양을 따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1년 안에 M16 소총 제조에 필요한 기술을 익혀 조병창에 국내 생산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강씨는 당시 한국 정밀기계공업의 수준이 매우 열악했다고 기억했다.
강씨는 "옛날에는 물건 하나를 주면 기술자가 보고 따라서 만들 수 있었지만, 하나 만들고 두 개째 만들면 규격이 약간씩 달라 총을 분해했다가 다른 총 부품에 맞추면 안 들어가거나 헐렁해지는 일이 생겼다"면서 "미국에서 배운 것은 제품을 공정별로 나누고, 공정마다 치수와 공구, 검사 기준을 설계해 같은 품질을 계속 만들어내는 기술이었다"고 설명했다.
강 씨는 M16 소총 부품 132개 가운데 스프링 16개, 냉간단조 부품 7개, 롤핀 11개 등 모두 34개 부품을 담당했다.
작지만 소총의 작동 안정성과 직결되는 정밀 부품이었다.
그중 롤핀은 당시 국내에서는 낯선 부품이었다고 강씨는 회상했다.
강 씨는 "스프링은 보통 사람들이 알지만 롤핀은 잘 몰랐다"며 "구멍에 끼우면 볼트 역할을 하면서도 분해 조립이 쉽고, 가운데가 비어 있어 무게도 줄일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거의 보지 못한 부품이었다"고 밝혔다.
27명의 도미기사는 1973년 1월 귀국했다.
강 씨는 "귀국한 그해 10월 국내에서 생산된 첫 M16 소총이 나왔다"면서 "첫 소총은 청와대로 보내졌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역사상 처음 만든 소총을 보고 너무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소총 한 자루조차 만들지 못하던 나라가 자체 생산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도미기사단에 주어진 임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콜트사와의 계약 조건에 따라 매년 10만정씩 모두 M16 소총 60만정을 생산해야 했다.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던 목표였지만, 도미기사단은 계획보다 앞서 60만정 생산을 달성했다.
강 씨는 "1년에 10만정씩 6년 동안 60만정을 만들게 돼 있었는데 우리가 5년 동안 다 만들어버렸다"며 "한 달에 1만정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프로세스 엔지니어링의 힘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매달 생산되는 1만정의 제품들이 일선에 보급이 됐는데 '미국서 수입한 것 아니냐'며 국산 소총이라고 믿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M16 국산화 과정에서 축적된 기술은 이후 국산 소총 'K계열' 화기 개발의 출발점이 됐다.
강 씨는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진이 부산 조병창에 머물며 K1, K2 계열 소총 개발을 함께 진행했다고 기억했다.
강 씨는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들이 조병창에 와서 우리와 같이 살다시피 했다"면서 "도면을 그려오면 우리가 만들어보고, 시험해보고, 안 좋으면 다시 고치고, 몇 번씩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개발했다"고 전했다.
도미기사들이 미국에서 배워온 정밀가공, 공정관리, 품질관리 기술은 이후 창원공단을 중심으로 성장한 국내 방위산업과 정밀기계공업의 밑거름이 됐다.
강 씨도 이후 창원 방산업체 등을 찾아 기술 강의를 하며 현장 기술자들에게 경험을 전수했다.
그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M16 탄환 클립을 단독 개발해 국산화한 공로로 1978년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다.
현재 도미기사단 27명 중 12명이 숨지고 생존자는 15명에 불과하다고 강씨는 말했다.
그들은 1세대인 자신들로부터 시작된 국산 무기 개발 기술이 오늘날 세계 9위의 무기 수출국 거듭난 'K-방산'의 시초가 됐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강씨는 강조했다.
강씨는 "총기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일해왔다"며 "제가 죽고 난 뒤에는 우리 도미기사단을 말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 누군가 처음으로 길을 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에 이렇게 이야기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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