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나'에 몰입하는 도보여행 길
(진주=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진주 진양호반 까꼬실은 도심에서 멀지 않지만, 인적이 거의 없는 오지와 다름없다.
오래전 남강댐 건설로 마을의 대부분이 수몰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소음을 끄고 자연과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도보여행 길인 '까꼬실 길'이 그곳에 있다.
◇ 자연과 '나'만 존재하는 세계
공기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소음이라곤 바람과 물 소리뿐인 땅,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자연의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 오지라면 까꼬실이 그러하다.
다만 까꼬실은 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깊숙한 땅이 아니다.
진주 도심에서 진양호 호반 길을 따라 자동차로 20∼30분이면 닿는다.
과거 까꼬실은 평화롭고 단란한 마을이었다.
이곳이 오지가 된 것은 1960년대와 1990년대 2차례에 걸쳐 지어진 남강댐으로 인해 마을의 대부분이 수몰된 데 기인한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고 했던가.
자연에 몰입하는 오지의 시간은 느리다.
복잡한 인간관계와 업무에서 로그아웃해 자연 속에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듯한 순간을 맛보고 싶다면 까꼬실 길을 걸어볼 일이다.
◇ 편하지 않지만 좋은 길
까꼬실 길은 진주시 대평면 내촌리 581-4에 있는 까꼬실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1코스는 주차장∼목교∼삼거리(갈마봉 방향)∼한골 삼거리∼편백 산림욕장∼학교가는길(귀곡초교 분교 옛터)∼시루봉까지 갔다가 시루봉에서 회귀해 귀곡초교 분교 옛터∼편백 산림욕장∼갈마봉∼황학산 방향(삼거리)∼목교를 거쳐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는 길이다.
거리는 5.1㎞이며, 보통 걸음으로 2∼3시간 걸린다.
2코스는 까꼬실 주차장∼황학산∼231봉∼톳제비 고개∼분토봉∼고인돌(지석묘)∼꽃동실∼청둑 선착장∼충의사 옛터∼가곡 탐조대∼한골 삼거리∼새미골∼하늘쉼터∼갈마봉을 거쳐 주차장으로 되돌아온다.
거리는 약 13.6㎞이며, 5∼6시간 소요된다.
1코스를 걸은 뒤 2코스 중 수변 길인 가곡탐조대∼충의사 옛터∼꽃동실을 탐방했다.
길은 초입부터 '까꼬막'이었다. 까꼬막은 경남 사투리로 '깎아지른 듯한 오르막길'을 뜻한다.
표준어로 바꾸자면 비탈진 언덕길, 고갯길 정도 되겠다.
오르막은 천천히 걸어 20여분이면 오를 수 있었는데, 이 '난 코스'만 지나면 길은 내리막이거나 평탄했다.
김향숙 진주시 문화관광해설사는 까꼬막은 걷기에는 불편하지만, 방해받지 않고 한 가지 생각에 잠기기 좋은 길이라고 소개했다.
탐방로 양옆에는 줄기가 굵은 왕대, 옛날 화살대로 쓰일 정도로 줄기가 가늘고 유연한 이대 등 대나무 종류가 울창했다.
진주는 예부터 대나무가 많이 나기로 유명했다.
다만 꽃을 피운 뒤 죽어가는 것으로 보이는 대나무가 적잖았다.
대나무꽃은 나무가 죽기 직전에 피어나는 '백 년만의 꽃'으로 알려져 있다.
대나무는 고사 지경에 이르면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 꽃을 피우고 생을 마감한다고 해석된다.
또 대나무는 한두 그루 죽는 데 그치지 않고 집단 고사하는 슬픈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지상의 대나무들은 각각 독립된 나무들처럼 보이지만 흙 속에서는 지하경이라는 땅속줄기로 연결돼 생사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한편 대나무 집단 고사는 길게 보면 끝이 아니라 세대교체의 시작일 수 있겠다.
꽃이 맺은 씨앗이 땅에 떨어져 발아하면 느리겠지만 대숲은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 백두대간의 끝점…꽃동실
편백 산림욕장에는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나무 침대가 몇 군데 놓여 있었다.
가곡 탐조대는 붉은부리갈매기, 흰뺨검둥오리 등 물새를 관찰할 수 있는 전망대였다.
2코스의 끝인 꽃동실은 백두대간의 끝점으로 불리는 장소였다.
백두산에서 지리산 천왕봉에 이르는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이 끝을 맺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곳은 남덕유산 찬샘에서 발원한 경호강과 지리산 천왕샘에서 시작된 덕천강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꽃동실에는 진양호반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가호전망대가 지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호수라는 뜻의 '가호'란 진양호를 일컫는다.
'둠둠∼ 둠둠∼' 멀리서 두드리는 북소리 같은 벙어리뻐꾸기 울음은 숲의 박동인가.
공기를 타고 온 진동이 귀보다 먼저 가슴팍에 와 닿는다.
'뻐꾹' 하고 높은 소리로 울어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다른 뻐꾸기들과 달리 이 새는 입을 다물고 발성하는 듯한 독특한 울음을 운다.
어여쁜 소리를 내는 꾀꼬리나 휘파람새가 솔로 연주자라면 차분하고 묵직한 숲의 위엄을 전하는 벙어리뻐꾸기는 관현악단의 첼로나 더블베이스격이다.
◇ 기억의 보존과 자연의 회복
귀곡초교 분교 옛터에는 이 학교 졸업생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쓴 시를 새겨 놓은 나무 푯말들이 늘어서 있었다.
'당신은 내가 왜 좋아 / 그냥../ … / 그럼 까고실은 왜 좋아 / 그냥..'(양병원 23회).
'… /참새떼 찾아들면 청솔가지 타는 연기 궁핍을 알까 / 노을이 취객되어 황학산에 쓰러졌다 / 어제 같은 세월책장 환청과 환상 잦는 / 물레는 돌고 까꼬실은 가슴에 살아있다'(정인옥 12회)
'까꼬실'은 지역 주민 사이에 불리던 마을 이름이었고, '귀한 골짜기' '부귀가 넘치는 동네'라는 뜻의 귀곡동은 이곳이 수몰되기 전의 행정지명이었다.
'귀곡' 대신 '가곡'이 지명으로 통용되기도 했는데 귀곡→가곡→까곡을 거쳐 '까꼬실'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어원 풀이가 회자한다.
까꼬실은 '까꼬막 너머 마을'을 뜻한다는 해석도 있다.
2코스에 있는 가곡탐조대에 세워진 안내판은 '천하지낙양 까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백두대간이 두류로 뻗어내려 황학으로 멎은 자락 / 경호와 덕천이 만나 남강으로 흐르고 / 비옥한 삼각주 퇴적지를 만드니 / 황학의 정상은 학의 머리가 되고 / 석정지와 꽃동실이 좌우 날개가 되니 / 다섯 마을 봉황이 알을 품어 안은 길지라 / 배산양수의 천하지낙양 / 걸출한 인물이 대를 이어 태어나고 / 소출이 풍성하여 재물이 풍부한 곳이더라'
옛터에는 시 푯말 외에도 학교 연혁, 졸업생 명단이 적힌 게시판 등이 세워져 있었다.
학교는 1940년 개교해 1997년 폐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698년 이전부터 존재했던 가곡서당이 학교의 모태였다는 내력도 눈길을 끌었다.
게시판은 1회부터 45회까지의 졸업생을 한 명 한 명 모두 거명하고 있었다.
1994년 2월 마지막으로 배출된 졸업생은 1명이었다.
한국 대중가요 및 영화음악의 5대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정민섭(1940∼1987) 선생은 3회 졸업생이었다.
선생은 '여고 졸업반' '대머리 총각' '곡예사의 첫사랑' '범띠 가시네' 등 가요 800여 곡,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등 600여 편의 영화 음악,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등 만화영화 100여 편의 음악을 작곡했다.
학교 터에는 실향민과 졸업생, 탐방객이 쉬어갈 수 있는 정자 2개가 세워져 있었다.
정자 아래쪽 수변에는 운동장이었을 법한 공터가 있고, '忠孝'(충효)라고 새겨진 비석이 서 있었다.
파초로 보이는 큰 초본 식물이 어른 키보다 높이 자라 비석에 그늘을 드리웠다.
작은 바나나 모양의 열매가 줄기 끝에 맺혀 있었다.
사진을 찍어 인공지능(AI)에 물어봤다. '바나나 포가 막 열리면서 어린 바나나 송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흥미로운 순간'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식용 바나나가 한국 노지에서 자라거나 스스로 씨를 퍼뜨리기 어렵다.
다만 땅속뿌리는 오래 산다. 혹시 오래전에 학생들이 심은 바나나의 뿌리에서 새 줄기가 난 것은 아닐까.
그럴 리 거의 없겠지만, 그 가능성만은 열어 놓기로 했다.
호숫가에는 여태 전깃줄을 달고 있는 시멘트 전봇대가 쓰러질 듯 안쓰럽게 물에 잠겨 있고 몇몇 버려진 농막과 농기구가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떠난 상실의 자리에서 자연의 생명은 이어져 폐허는 대지의 숨결 가득한 성지로 회복되고 있었다.
◇ 남강댐과 진양호
남강댐은 낙동강 수계에 건설된 최초의 다목적 댐이다.
남강을 가로지르는 댐은 1962∼1970년, 1989∼1999년 2차례에 걸쳐 건설됐다.
상수원, 농·공업용수 공급, 홍수 조절, 발전 등의 기능을 한다.
남강댐 건설로 만들어진 인공호수를 진양호라고 한다. 진양은 진주의 옛 이름이다.
진양호 공원, 대평면 등에는 수몰된 마을 이름을 새기고 실향민을 위로하는 망향비가 세워져 있다.
1급수의 맑은 물에서만 사는 수달의 서식 밀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꼽힐 만큼 진양호는 깨끗한 수질을 자랑한다.
진양호는 동양화처럼 은은한 풍광 속에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한 원시적 생명력을 품어 일대에서 최대 휴식처이자 관광지로 꼽힌다.
까꼬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진양호는 마치 다도해를 산속에 옮겨 놓은 듯하다.
호반 길은 구불구불 이어지고,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산들은 작은 섬처럼 보인다.
호수 건너편 비밀의 세계, '가까운 오지'로 안내하는 통로처럼 보이는 진양호반 길은 '힐링 로드'라고 불러도 좋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6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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