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공화국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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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공화국을 향하여

프레시안 2026-06-06 09:11: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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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인류 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긴박한 문제 가운데 하나로 떠오른 것이 바로 환경 문제이다. 산업혁명 이래 전 지구적으로 퍼져 나간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경제 개발은 심각한 환경오염과 공해 그리고 지구 온난화로 대표되는 기후 변화를 초래했다. 환경문제는 이제 그 어떤 국가도 외면할 수 없는 절박한 문제가 되었다.

우리에게 <총, 균, 쇠>로 유명한 문명사가 제러미 다이몬드는 2016년 국내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환경 파괴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50년뿐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지속 가능한 생존을 위해서는 환경을 파괴하는 대신 지속 가능한 경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를 위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아니라 더 큰 정치적 의지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그 정치적 의지는 단순히 정책적 배려나 관심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성장 일변도의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뒷받침했던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성찰과 비판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때 친환경적 지속가능성을 담보해 줄 수 있는 대안적 이념은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논의는 이미 한 세대 전에 시작되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시도가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을 환경 문제에 결부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 세기 70년대 이후 지식인들의 정치 사회적 담론 세계에 새롭게 등장한 공화주의가 환경문제에 어떤 발언을 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보자.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 된 후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공화주의는 개인의 사적 이익 보다는 공공의 복지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을 우선한다. 그런데 환경문제에 대한 실질적 접근은 개인의 사적인 경제적 물질적 욕구를 공동체의 공익의 이름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따라서 공화주의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매우 소중하고 유용한 이념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한계

산업혁명 이후 근대 자본주의의 성장제일주의에 입각한 전 지구적 개발과 경제적 팽창은 생태 환경의 한계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자연을 그 안에서 더불어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개발의 명목으로 착취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친 생태 환경적 목소리는 묵음으로 처리되었고 서서히 다가오는 생태 환경적 위기는 무한히 연기되리라는 막연한 낙관론이 팽배했다. 과학과 산업 기술에 대한 우상 숭배가 이를 부추겼다. 현대 사회의 생태 환경적 위기는 "근대성의 정상적 세속적 실천"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다름 아닌 자유주의였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사적 이익의 추구를 정당화하고 그것들이 종국에는 충돌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조절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공공의 복지 혹은 공동선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사적 이익의 추구를 통제하려고 하거나 자동적으로 조절되는 질서 대신 새로운 질서를 기획하려는 행위는 자유주의 근대 국가 안에서는 용납될 수 없었다. 개인의 경제 행위에 대한 국가의 간섭은 즉각 전체주의와 전제라고 규탄받았고 자기 소유권에 대한 절도로까지 비난받았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자유 시장 경제라는 우상을 만들어내 이에 경배하지 않는 모든 이념을 용도폐기하려고 하였다. 무한 경쟁과 무한 성장의 신화 안에는 생태 환경적 한계에 대한 배려와 관심 따위는 차지할 자리가 없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지난 세기 후반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경제 단위를 국민 국가에서 전 지구적으로 확대했다. 모든 것이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고 그것은 양극화뿐만 아니라 생태 환경적 위기도 심화시켰다. 특히 개발도상 국가들에서는 세계화된 경제의 수요 공급의 원리에 따라 미개척지들이 생태 환경적 고려 없이 개발되었고 화석연료에 의존한 산업화는 선진화로 자리매김 되었다. 다국적 기업의 초주권적 경제 행위는 이러한 세계화에 오염되지 않은 지역을 포식해 갔다. 세계화는 이제 전 지구적 생태 환경에 체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자유주의는 지난 세기 중반 존 롤즈의 출현으로 전통적인 자유지상주의적 요소를 극복하고 재분배의 문제에 관심을 표명함으로써 그 사회적 성격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롤즈의 자유주의도 환경 문제 앞에서는 효과적인 발언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롤즈의 자유주의도 전통적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가치 중립주의라는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는 개인이 알아서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실천하면 되지 국가나 사회 혹은 공동체가 그 해답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 중립주의는 우선 자유 시장이라는 환상을 깨지 못한다. 나쁜 것은 거기서 도태될 것이기 때문에 시장 외부의 간섭과 통제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경 문제도 자유 시장에서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계약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너무나 비현실적인 해결책임이 입증되지 않았는가?

생태 환경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이제 어떤 것이 좋은 삶인지를 개인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자유주의적 중립주의는 유효하지 않다. 생태 환경 문제는 개인이 어떤 삶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것인지에 맡기기에는 이제 너무 큰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국가와 사회 혹은 공동체가 숙의를 통해 그 해결책을 마련하고 그 시민단이 참여와 연대를 통해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할 문제이다. 그렇지만 롤즈의 자유주의도 전통적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정치 공동체를 각자 자신의 인생 계획을 자율적으로 자기가 알아서 실현하기 위해 모여 있는 개별적 주체들의 단순한 집합체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국가와 공동체의 개입은 최소화되어야 하며 이 원리는 환경 문제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자유주의자들은 한나 아렌트와 마이클 샌델과 같은 공화주의자들처럼 개인을 사회적 관계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공동 자아를 지니고 있는 구성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비연고적 자아의 주체일 뿐이라고 전제한다. 롤즈는 이를 자아가 목적을 선행한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개인주의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이 자동적으로 조절되는 자유 시장의 신화를 뒷받침해 주고 있으며 그것은 작금의 생태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데 본질적인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또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엄격히 구분하고 서열화한다. 즉 사적 영역에 대한 간섭을 침범이라고 죄악시하면서 그것을 신성시하고, 공적 영역의 문제는 단지 법과 규정의 절차에 의해서 해결하면 되는 소극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면서 이때 생태 환경 문제를 사적 영역의 문제로 국한한다. 즉 개인들이 자신들의 선택을 통해 생태와 환경 문제에 신경을 쓰는 친환경적 소비자가 되면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생태 환경 문제를 구조적 사회 문제로 보고 그 해결책을 추구하려는 시도를 방해할 뿐이다. 예를 들어 유전자 조작 식량 대신 친 환경적 식량을 선택하겠다고 소비자들이 마음을 먹어도 구조적으로 세계화된 식량 생산 공급 체계가 이미 반환경적 기업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면 개인의 선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문제는 그 구조를 혁파해야 해결되는데 그렇게 할 것인지도 또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라면 결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렇듯 자유주의의 한계가 분명히 인식되면서 생태 환경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사회적 담론들이 나타났다. 이른바 '녹색' 이데올로기들이다. 또한 유럽에서 녹색당이 본격적으로 현실 정치 무대에 진입하면서 생태 환경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자유주의의 대안에 대한 모색도 활발해졌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드디어 공화주의도 녹색 이데올로기로 편입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생태주의와 녹색 공화주의

오늘날 우리는 '녹색'이라는 접두어를 부쳐 정치 사회 경제의 여러 문제들을 인식하고 논의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난 세기 후반에, 특히 마지막 이 십여 년 동안에, 일어난 지구 환경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그 극적인 예가 있다. 1988년 영국의 대처 총리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화석연료의 대량 사용과 같은 최근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엄청난 변화로 인해 지구의 환경 생태적 균형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고 경고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연 세계의 균형을 보존하는 것이 20세기 말의 가장 큰 도전이라고 선언했다.

주지하다시피 대처 노선의 근간인 신-자유주의는 대기업과 자유 시장 경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공동체적 이익보다는 개인의 욕구를 중시하는 정책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것은 환경운동이 추구하는 노선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대처의 선언은 더욱 충격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이 선언은 역설적이게도 향후 환경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세력들이 당파를 가리지 않고 환경 문제를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삼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환경에 관한 인간의 생각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생태주의(ecologism)라는 전혀 새로운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등장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막연한 인식을 넘어서 종래의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에서 생태중심주의적 자연관으로의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였다. 자연은 인간에게 단순히 도구적 가치를 지닌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본래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하나의 체계로서 인간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주의는 인간의 행복과 편리를 위해 자연을 착취한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이 작금의 환경 문제라는 전 지구적 위기에 책임이 있다고 단정했다.

또한 생태주의는 성장지상주의를 배격하고 성장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유한한 체계 안에서 고갈 될 수밖에 없는 자원의 희소성과 인간 행위가 유발한 생태계의 돌이킬 수 없는 불균형은 재앙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기술의 진보와 시장 기능이 이러한 위기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는 성장지상주의자들의 낙관론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생태주의는 국민총소득 지표로 성장의 성공을 측정하는 경제체제는 붕괴되고야 말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지상주의를 정책의 지상 목표로 삼는 근대 국민 국가 체제도 환경 문제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단정한다. 따라서 생태주의는 탈 중앙집권제적 지역 공동체를 인간의 생산과 소비의 활동 단위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어야만 공급과 소비가 투명해져 환경 파괴를 피할 수 있고 사회와 자연의 지속가능성이 담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주의적 시각은 공화주의와 어떻게 만날 수 있고 또 어느 지점에서 배치되는 것일까? 생태주의와 공화주의가 만나 녹색 공화주의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속가능한 사회경제는 무한경쟁 시장경제 체제와 팽창적 화석연료에 기초한 자본주의를 극복할 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즉 녹색 공화주의는 생태 환경에 대해서 말할 때 자본주의 정치경제의 생태적 조건을 보존하려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과연 오늘날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아니 그렇게 세뇌된, 자유 시장과 자본주의 없이는 자유로운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는 일종의 환각 상태에서 어떻게 깨어날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그러나 녹색 공화주의는 국민 국가의 초월 혹은 폐기와 지나친 탈 인간주의를 주장하는 급진적 무정부주의적 생태주의 정치이론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경제활동이 의존하고 있는 생태 환경의 재생능력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인권을 보장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환경적 불의를 척결할 수 있는 방법을 국민 국가적 차원에서 그리고 동시에 전 지구적 차원에서 모색한다.

이를 위해 녹색공화주의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과 같은 사회경제적 양극화, 환경적 재앙을 불러온 일정한 책임이 자유주의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공화주의는 전통적으로 자유주의가 무관심했던 사치와 물질적 부의 추구와 그것의 독과점에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것이 시민적 덕의 쇠퇴, 평등의 파괴, 공적 연대감의 약화, 시민의 유약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녹색 공화주의는 부의 과도한 창출과 잘못된 분배와 낭비를 비판한다. 인간의 그러한 행태는 사회 공동체와 자연 환경 모두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녹색 공화주의는 녹색 소비주의도 거부한다는 점이다. 즉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단지 개인의 소비 행태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정치적 제도화를 통해 기존 체제를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공동선을 구현하기 위해 경제에 대한 정치적 규제가 제도적으로 가능하게 될 때 비로써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자유 시장 체제는 성장에 대한 환경적 제한을 인식하지 못 해 왔고 동시에 인권과 같은 비경제적 원리에 대해서도 눈감아 왔다. 실제에 있어서나 고전 경제 이론에 있어서나 자본주의 경제는 구조적으로 외적 성장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생태적 체계의 고정된 한계 안에서는 견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 정치적 규제의 정당성이 근거한다. 시장이 경제 성장에 중독되어 있는 이상, 그것을 구조화시키는 자본주의적 자유주의가 계속해서 최면을 거는 이상, 정치적 규제는 불가피하다. 경제를 생태 환경적 체계 안에 다시 적응시키기 위해서는 경제를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원리에 적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질서의 경제적 합리성이 화폐와 자연에 대한 사회적, 비시장적 규제 안에서 실현될 때 비로써 인류 사회는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통해 시민적 평등과 자유가 보존되고 공동선이 증진될 때 비로소 국가는 '공공의 것'으로서 공화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칼 폴라니가 일찍이 갈파했듯이, 시장은 자신이 스스로 적응해 나간다는 생각은 암흑의 유토피아를 반드시 수반한다. 우리 사회의 인간적 자연적 실체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시장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을 파멸시키고 그 환경을 황폐화시킬 뿐이다. 애당초 공동체 혹은 사회 같은 것은 없다고, 시장보다 더 높은 곳은 없다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의존할 수밖에 없는 환경 생태를 파괴시키고 착취와 양극화를 통해 인간적 관계 또한 비인간적으로 황폐화시켰다. 결코 시장은 자생적 질서에 의해 자동적으로 작동되는 유기적, 자연적 실체가 아니다. 시장은 단지 정치 공동체에 의해 만들어지고 입법 행위에 의해 지배받는 교환 기제에 불과하다. 즉 통제되고 규제되어서는 안 되는 신성한 것이 아니다. 근대 초 자본주의가 등장하여 성장할 때 발화된 공화주의 담론은 바로 이러한 신성화에 대한 대항 담론이었다.

녹색 자유주의의 반동

이러한 생태주의와 녹색 공화주의의 만남은 사회적 담론 세계에서 녹색 자유주의의 반동에 직면했다. 즉 자유주의가 생태주의와 녹색 공화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생태 환경과 길항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녹색 자유주의는 개인들이 각자 생태 환경적 책임을 인식하고 자원의 재활용과 같이 삶의 방식을 조금만 바꾸면 자유 시장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없이도 생태 환경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자유 시장이 결코 생태 환경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찍이 빌 클린턴은 1992년 지구의 날 행사 연설에서 생태 환경을 위해 경제를 희생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했다. 강력한 시장이 환경 문제도 곧 해결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환경 보호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선언하면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녹색 엄지'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와 자유 시장 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생태 환경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는 대신에 반대로 자유 시장 경제의 원활한 작동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들이 펼쳐졌다. 생태 환경을 위해 지역 농민 시장을 활성화하고 이웃 공동체를 재건한다고 해서 애덤 스미스와 시장을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을 소비한다고 해서 코뮌의 구성원이 되거나 사회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시장은 강력하고 명백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향만 주어지면 시장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신속한 해결책을 제공할 것이지만 구조적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너무 긴 시간을 필요로 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환경 운동의 방향 전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경제 성장을 방해하는 규제 일변도의 정책을 주장하는 환경 운동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반대로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 성장이 어떻게 환경 보호라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공헌할 수 있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제 더 이상 환경 운동이 자유 기업 정신을 훼손하는 급진적 개혁 운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러한 주장들은 목소리를 높힌다. 그러면서 따지고 보면 환경 운동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경제 성장이 가져다 준 풍요를 누렸기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러한 주장은 자본주의는 생태 환경적 위기도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지구를 구해 내리라는 자유주의적 낙관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작금의 생태 환경적 위기 상황은 자본주의가 풀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고 낙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녹색 자유주의는 그것은 녹색 기술 혁신이 올바른 시장 기제가 작동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오직 자유 시장만이 청정에너지와 같은 해결책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자유 시장만이 녹색 기술을 상업화시켜 보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경제 성장은 그 자체가 녹색이다. 따라서 환경 운동이 무엇인가 변화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에 대한 구조적 개혁이 아니라 단지 개인들의 삶의 스타일의 변화이다. 이렇듯 녹색 자유주의는 개인들이 가능한 한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면 현재의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에 대한 구조적 변화 없이도 생태 환경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녹색 자유주의의 기저에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환경적 실용주의가 깔려 있다. 즉 생태 환경의 위기가 저항운동의 일환으로서 환경운동을 통해 해소될 수 없다는 믿음이 실생활에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생태 환경적 사고를 전회 시킨 것이다. 녹색 자유주의는 거리에서 정부와 대기업을 성토하며 투쟁하는 것 보다는 바로 생활 현장에서 생태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도구를 찾아내는 것이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실용적 방법이라고 확언한다. 반 자본주의적 구호를 외치면서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요구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화장실을 친 환경적으로 개조하는 것이 더 혁명적이라고도 주장한다.

또한 녹색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가치 중립주의가 생태 환경적 가치의 추구와 길항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생태 환경적 가치가 자연을 인간과 다른 것으로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면 그것은 자유주의가 사회 안에서 타자들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다름을 인정하면서 다른 여러 가지 삶 가운데 특정한 삶이 좋은 삶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다름을 인정하고 인간의 우위성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약 생태 환경적 위기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후속 세대들이 자기 나름대로 좋은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생태 환경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자유주의의 가치 중립주의와 상충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즉 현재 세대가 생태 환경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후속 세대의 자유주의적 삶이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녹색 자유주의는 경제 위기의 와중에 신-자유주의적 기업우선주의와 성장제일주의가 기득권 언론 매체를 통해 전파되면서 더욱 기를 펼 수 있었다. 영국의 비판적인 일간지 가디언 2011년 12월 11일자에 게재된 한 논평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논평에 의하면 이제 미국에서나 영국에서나 환경보다는 경제가 더 우선시 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갤럽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응답자들은 54 대 36으로 경제가 더 중요하다고 응답했고, 영국에서는 총리실에 접수된 웹사이트 탄원 가운데 유가를 내리라는 탄원에는 12만 5천명이 서명한 반면 대체 에너지 개발을 위한 투자에 눈을 돌려 기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자는 탄원에는 단 11명이 서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국민들은 생태 환경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동선을 위해 희생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설득 받는 대신 이제 티브이를 안 볼 때는 플러그를 빼놓고 주전자에 물을 끓일 때는 적정량만 끓이자는 등 사소한 일상적 행위가 요구되고 있다고 이 논평자는 개탄하고 있다.

녹색 공화국을 향하여

그렇다면 녹색 자유주의에 대항해 녹색 공화주의는 무엇을 말해야 하나? 우선 생태 환경의 문제가 단순히 개인들의 행위를 수정해 녹색 소비자 생활인이 되게 함으로써 해결 될 수 있는 개인적 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녹색 소비주의 자유주의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생태 환경적 문제는 개인이 알아서 대처한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 지성을 통해 현재의 정치 사회 경제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고 그 해결책을 정치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태 환경 문제도 현대 사회의 권력 관계를 재배치하지 않는 한 풀 수 없기 때문이다. 착한 녹색 소비자가 되어 팽창적 자유 시장경제체제의 순응자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생태 환경 문제를 야기한 지배적 권력 관계를 와해시킬 수 있는 정치적 저항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생태 환경의 위기는 집단적, 문화적, 정치적 위기이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이때 공화주의의 핵심 요소인 참여와 연대의 덕이 요청된다. 공화주의는 공동선과 공공의 복지를 위해 공적인 문제에 대한 숙의와 결의의 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이 될 것을 요구한다. 또한 거기에서 도출된 결론을 관철하기 위해 연대하여 두 눈을 부릅뜨고 사회 일부분의 이익이 공익으로 둔갑되는 것을 막아내는 것을 시민적 덕으로 여긴다. 이럴 때 비로소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이 되고 국가는 '공공의 것'이 되는 것이다. 녹색 공화주의는 생태 환경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민적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처럼 개인들이 각자 알아서 자기가 생각하는 좋은 삶을 살면 된다고 한다면 사회적 문제들은 공적 문제가 되지 못 하고 사적 문제로 격하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생태 환경 문제도 개인이 알아서 선량한 녹색 소비자가 되고 철저한 쓰레기 분리수거로 자원을 재활용하는 모범 주민이 되면 풀 수 있는 문제 아니다. 그것은 유덕한 시민이 되어 왜곡된 정치 사회 경제적 권력 관계를 재편해야 한다는 공동의 일에 자기 몫을 다 할 때 가능하다.

그 다음으로 녹색 공화주의는 녹색 자유주의의 막연한 낙관론을 거부해야 한다. 녹색 자유주의는 근대에 들어와 인간의 지적 발전의 결과물인 과학과 기술이 자본주의와 결합되면서 인간은 비로소 빈곤과 질병 그리고 압제에서 벗어났다는 근대성의 신화를 철저히 신봉한다. 작금의 생태 환경적 위기도 과학, 기술, 자본주의라는 삼총사가 곧 처리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녹색 자유주의는 생태 환경론자들의 근대성에 대한 비관적 평가를 좌파의 트집 잡기와 판 흔들기로 치부한다. 공화주의는 근대성에 대한 도전으로 지성사에 등장했다. 자본주의와 상업의 발전이 인간을 사적 이익의 추구자로 전락시키고 인간 사이의 예종관계를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공화주의는 상업화와 자본주의의 발전의 결과물인 사치에 대해 언제나 비판적이었다. 그것이 위화감을 조성하고 건전하고 질박한 생활을 통해 시민적 평등을 확인할 수 있는 여지를 파괴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공화주의가 녹색 이데올로기와 만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공화주의는 애초부터 자본주의적 시장의 지배를 반대했고 그 결과물인 과소비와 낭비에 적대적이었다. 자유주의처럼 그런 문제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동으로 조절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작금의 생태 환경적 위기는 근대성에 기초한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낙관론적 소비주의에서 기인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자유주의적 낙관론은 얼마나 질긴 것인지 그 사이에 공황과 심각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았다. 녹색 공화주의는 그러한 자유주의적 낙관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고발한다. 생태 환경적 위기는 비인간적인 양극화와 쌍둥이로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낙관론적 소비주의를 통해 불사신이 되려고 하는 데서 태어났다. 그것은 공화주의가 지향하는 '공공의 것'으로서의 국가로 작금의 권력 관계를 재편하지 않으면 해결 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낙관론의 최면에 빠지지 말고 근대성에 대한 정치경제적 성찰과 시민적 경각심의 고삐를 늦추면 안 된다. 녹색 공화주의는 이를 지향한다.

다음으로 녹색 공화주의는 생태 환경적 위기를 자유의 위기로 간주한다. 자유주의는 자유를 간섭의 부재로 규정한다. 따라서 생태 환경의 위기를 운운하며 기업 활동에 간섭하거나 규제를 입법하는 것은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가 초래한 문제는 시장의 자동 조절 기제가 해결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규제와 통제는 문제 해결을 오히려 방해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율적인 친환경적 선택과 실천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공화주의는 자유를 단지 간섭의 부재로 규정하지 않는다. 자유는 자의적 지배의 부재라는 것이다. 자유를 간섭의 부재로만 규정하면 노예도 자비로운 주인에게 간섭받지 않는 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노예는 주인이 언제라도 간섭할 수 있음을 알고 늘 자기 자신을 스스로 검열하고 통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 자유롭다는 것은 그 누구도 나에게 자의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지위나 잠재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누구도 나를 지배할 수 없을 때 나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타인의 자비가 허용하는 것을 자유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태 환경적 위기는 왜 자유를 침해하는 것인가? 그것은 생태 환경적 위기를 초래한 자본과 권력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 위해를 가함으로써 우리에게 직접적인 간섭은 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선택의 입지를 좁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지배하게 되고 그들의 자비에 의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듯 공화주의는 본질적으로 녹색이 아닐 수 없다. 공화주의는 생태 환경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통해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비합리적이거나 비도덕적이지 않다는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의 소유적 개인주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공화주의는 무분별하고 무절제한 욕망의 추구를 시민성의 발현을 가로막는 방해물로 보기 때문이다. 공화주의는 무한한 경제적 성장을 통한 차별적 욕구 충족이 아니라 균등한 분배를 통한 평등하고 질박한 삶이 행복을 담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녹색을 띠지 않으면 공화국일 수 없다.

작금의 생태 환경적 위기는 이러한 녹색 공화국의 수립을 위한 규범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즉 개인들의 미시적 대응으로 그 위기에 맞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공화주의가 강조하는 공공 교육, 공적 참여, 덕의 발휘를 통한 공동선의 성취가 시민들을 좀 더 생태 환경적으로 책임을 지는 시민으로 만들 수 있다. 개인적 사익을 초월해 공동체의 공동선을 고려해 사고하고 행동하는 시민들만이 생태 환경적 책임감을 인식하는 시민이 될 수 있고 이를 통해 지속가능하고 스스로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녹색 공화주의적 시민성은 단지 개인의 선택의 대상으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위기의 시대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정언 명령이다. 시장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우리가 시장의 주인이다. 생태 환경적 위기를 심화시켜 지속가능한 세계를 담보할 수 없게 만드는 시장의 작동 기제를 우리가 통제하거나 정지시킬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인간인가?

▲2024년 6월 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녹색당의 마지막 선거 유세에서 녹색 바탕의 EU 깃발이 선보였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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