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선관위의 존재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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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로] 선관위의 존재 이유

연합뉴스 2026-06-05 10:51:3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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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 선거행정 참사에 부끄러운 대한민국…'선거 무결성' 원칙 되새길 때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민주정(民主政·Democracy)의 꽃은 선거다. 국가 권력 창출이 온전히 선거에 의해 이뤄져서다. 권력의 주인이 바뀌면 부와 일자리 등 한정된 자원의 분배 흐름과 작동 방식도 변한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조차 누가 완장을 차고 영향력을 더 많이 행사할지가 결정된다. 민주국가라면 세계 어디든 마찬가지다. 이처럼 선거는 국민 각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사실상 모든 사회적 이해관계를 재설정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선거 관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공무(公務)로 인식되는 이유다. 현대식 민주정 태동 이후 여러 나라에서 선거 절차를 둘러싼 시비나 부정 논란이 잦았던 것도 선거 관리의 중요성을 방증한다.

우리나라가 방대한 조직과 혈세를 쓰는 선거 관리 조직을 별도 기구로 둔 이유도 선거 관리가 민주국가 체제의 핵심 기반임을 인식하고 있어서다. 독립된 합의제 헌법기관인 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1963년 1월 설립됐다. 원래 행정부에서 선거를 관리했지만, 1960년 3·15 부정선거 여파로 독립된 선거관리 기구 필요성이 제기된 데 따른 결과다. 출범 후 약 9개월 만에 치른 첫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국가수반 대행이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제5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현재 선관위는 9인으로 구성된 중앙위 산하에 각 행정단위별 위원회가 있고, 전반적 실무는 사무처가 담당한다.

잠실7동 2투표소 투표함 이송 잠실7동 2투표소 투표함 이송

(서울=연합뉴스) 박동주 기자 = 5일 서울 송파구 잠실7동 2투표소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 조치한 뒤 투표함이 개표소로 이송되고 있다. 이 투표소에서는 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 시간이 오후 10시까지 연장됐고, 투표함이 개표소로 옮겨지지 못했다. 2026.6.5 pdj6635@yna.co.kr

쉽게 말해 독립기구로 선관위를 둔 건 부정선거에 대한 반성이 출발점이란 얘기다. 그런데 6·3 지방선거에서 생겨선 안 될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했다. 서울 송파·강남구, 인천 연수구 등 수도권 일대 투표소 10여 곳에서 투표용지가 모자라 투표가 중단된 것이다. 민주정을 지탱하는 선거제도 자체를 훼손하고 유권자의 참정권을 침해한 당사자가 선거 절차의 수호자인 선관위라니 어이가 없다. 가난하고 문맹률 높던 건국 초기에도 투표지가 없어 투표를 못 하는 미개한 일은 없었다. 이미 선거 무효 시비와 재선거 요구가 불거지고 투표함 반출 저지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법적 다툼을 비롯한 후폭풍이 이어질 전망이다. 게다가 선관위의 사후 대응과 해명은 문제점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이처럼 선관위가 본분인 선거 관리조차 제대로 못 해 논란의 진원지가 되는 어이없는 일이 너무 잦다. 심지어 부정선거 주장의 불씨를 계속 제공하고 있으니 탄생 배경을 스스로 부정하는 심각한 역설이다. 2022년 대선에서의 '소쿠리 투표' 논란이 대표적이다. 유권자가 기표한 투표지를 선거 사무원이 대리 수거해 투표함으로 옮겨 '직접·비밀투표'라는 대원칙을 훼손했고, 투표지를 플라스틱 바구니, 종이 상자, 쇼핑백 등에 담았다. 이 상황에서 일부 기표가 된 투표지가 다른 유권자에 배부돼 부정 의혹이 제기됐고, 결국 노정희 중앙선관위원장이 사퇴했다. 2020년 총선에선 투표용지에 바코드를 인쇄하라는 선거법을 무시하고 QR코드를 인쇄해 선거무효 소송과 재검표 사태가 잇따랐다. 2024년 총선에선 사전 투표함 관리 부실 논란이 불거졌고, 2025년 대선에서는 선거사무원이 신분증을 도용해 대리 투표하다 구속되는 초유의 사건도 있었다.

선관위는 논란이 일 때마다 고개를 숙였지만, 제대로 된 대책을 만들고 조직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라는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많다. 실제로 이런 어이없는 일이 계속 반복되니 선관위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선진국에선 우리와 달리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엄중히 대응한다. 2021년 독일 베를린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과 용지 배부 오류 사태는 선거 무효 및 재선거로 귀결됐다. 같은 날 연방하원 총선에서 관리 부실이 확인된 베를린 선거구들에서도 재선거가 치러졌다. 오스트리아는 2016년 대선에서 우편투표 관리 부실이 일부 드러나자 선거 결과를 백지화하고 재투표를 실시했다. 관리 부실이 결과에 영향을 줬는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절차상 결함 자체가 선거 전체 신뢰를 훼손했으니 그 자체로 결과가 무효라고 봤다.

개표 작업 개표 작업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6·3지방선거일인 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개표소에서 개표사무원들이 사전투표함을 개함하고 있다. 2026.6.3

선거는 공정성과 무결성 원칙이 생명이다. 절차에 결함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선거 전체 공정성을 의심받고, 이는 민주정 체제 자체를 흔든다. 이 중차대한 일을 잘하라고 선관위를 따로 만들어 놓고 우리 혈세로 봉급을 준다. 그런데 선관위는 본업도 제대로 못 하고, 이번처럼 사고가 나면 적당히 넘어가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 헌법상 독립기구라는 지위 뒤에 숨어 조직원들이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그러니 일각에선 선관위를 폐지하고 선거 관리 업무를 옛날처럼 차라리 행정부에 맡기라는 주장마저 나올 정도다. 최소한 정부 부처는 책임 소재를 명확히 따져 잘잘못을 가려 물을 수 있고, 민심에도 민감하므로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일하진 않을 거란 주장이다.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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