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선이 모여 하나의 형상을 이루듯, 예술가 안민정을 만든 유년의 조각들은 어떤 모양이었을지 궁금합니다. 예술가를 꿈꾸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그림 외에 다른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친언니 두 명 모두 미술을 하고 저도 그걸 보며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땐 화가 또는 디자이너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고등학교도 디자인과로 진학해 졸업 후 자연스레 웹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고, 그 일을 작업과 병행하며 20년 가까이 이어갔죠. 스무 살 때 처음 접한 웹이라는 매체는 저에게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제가 그린 걸 전 세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확장성이 있고, 무엇보다도 언제든 수정하고 지울 수 있다는 점이 좋았죠. 그러다 대학 진학을 위한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며 처음으로 클라이언트를 위한 디자인이 아닌 ‘순수하게 그린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때 진정한 자유 속에서 순수 미술, 예술에 눈뜨게 되었어요.
도면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형식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대학 시절, 우연히 본 건축 도면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어요. 불필요한 요소가 하나도 없고, 모든 기호가 정보로 이루어졌는데도 아름답다는 점이 흥미로웠죠. 이후 ‘내 몸을 도면처럼 옮겨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눈은 실제 건축 도면에 쓰이는 창문 기호로, 입은 말과 음식이 오르내리는 구조를 계단 형태와 치아의 개수로 표현했고, 코로 드나드는 공기의 흐름은 날씨의 온난전선 기호를 차용하는 방식으로 자화상을 구성했어요. 처음에는 얼굴만 있는 작품을 대학원 과제전에 냈어요. 이를 본 서진석 디렉터님의 제안으로 외부 전시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전신으로 확장된 작업을 처음 선보이게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작업은 여의치 않은 환경에서 모든 걸 풀어가야 하는 과정이었어요. 노트북이 없어 학교 공용 컴퓨터로 작업하고, 캔버스 대신 A4 용지를 이어 붙여 출력하고, 재료도 대부분 주워서 사용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때는 그걸 힘들다 생각하지 않고, 특별히 불평하기보다는 흘러가는 대로,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자연스럽게 방법을 찾아나갔어요. 돌아보면 오히려 그런 태도와 환경이 지금의 작업 언어를 만들어낸 것 같아요.
정밀한 도면의 언어와 사적 서사가 교차합니다. 작업은 일상의 어떤 순간, 혹은 어떤 감각에서 시작되나요? 어떤 특별한 영감에서 시작하기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에서 출발해요. 컴퓨터를 다룰 수 있고 도면이라는 언어에 매력을 느꼈는데, 그 둘이 만나 지금의 작업 방식이 된 거죠. 또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예요. 사람들은 과학이나 수학처럼 눈에 보이는 체계는 신뢰하지만, 감정이나 관계 같은 것은 쉽게 간과하잖아요.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을 구조화하고 기호화해 보이게 하고 싶었어요. 결국 사람은 아주 얇은 껍질 하나를 두르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피부를 1mm만 벗겨내도 우린 모두 시뻘건 덩어리잖아요. 그 껍질을 벗기고 하나의 정보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모두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진 평면 도면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안의 보이지 않는 신념이나 이야기들이 각자를 다르게 만들죠.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기호와 과학적 원리를 다루는 과정은 어땠나요? 기호에는 날씨, 양자역학 같은 여러 분야의 개념이 들어가요. 예를 들면 기도하는 모습을 자기장으로 표현하는 식이죠. 이런 원리를 공부하는 과정이 필요하긴 하지만, 결국 제 작업은 제 경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크게 어렵진 않았어요. 작업하며 웹 서핑을 통해 다양한 이미지와 자료를 찾아보는 걸 좋아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러 분야에 노출됐고 도면이나 구조 이미지, 과학적 시각 자료도 많이 접했어요. 그렇게 축적된 이미지들이 지금의 기호언어로 이어졌고요. 물론 그 기호들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면 당연히 그렇진 않죠. 여기서 중요한 건,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는 일상적인 것을 과학적이고 구조화된 언어를 통해 다시 바라보게 하는 것이에요. 결국 사소한 순간의 감정이나 관계를 어떻게 더 중요한 의미로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육인가족도(六人家族圖): 어머니는 명절에 모인 가족들에게 그동안 키우신 알로에를 나누어주셨다’, ‘가화만사성(六人家族圖: 家和萬事成)’과 같이 가족이라는 주제가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가 있을까요? 가족은 제 삶에서 가장 직접적인 경험이에요. 딸만 넷인 집에 막내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가족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과 긴장을 자연스럽게 보며 자랐어요. 그런 경험이 작업으로 이어졌죠. 특히 출산 이후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크게 바뀌었어요. 아이를 낳고 나서야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는 감각을 처음 알게 되었거든요. 아이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요. 또 출산 이후 처음으로 여성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깊은 경이로움을 느꼈어요. 열 달 동안 아이를 품고 출산 후 젖을 먹이며 엄마로서 아이와 맺는 아주 깊고 밀착된 관계의 친밀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그런 시간을 지나며 작업에서도 관계를 바라보는 태도와 감정의 결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죠.
뉴욕 MoMA에 소장된 자화상 작품 제목 ‘라하프(Rachaph)’가 인상적입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Rachaph’는 ‘운행하다’, ‘보호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예요. 독수리가 새끼를 돌보듯 그 위를 맴돌며 지켜보는 상태를 뜻하기도 하죠. 2024년에 제가 엄마가 된 후의 모습을 자화상으로 작업하던 중 당시 교회 주일 설교 제목이 ‘Rachaph’였어요.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감싸고 보호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내가 가족을 지키고 있다고만 생각해온 시선이 바뀌게 됐어요. 내가 누군가를 돌보고 보호하는 존재인 동시에, 나 역시 보이지 않는 힘의 보호를 받는 존재라는 감각이 강하게 와 닿았죠. 그래서 태아에게 산소와 영양을 공급하며 보호하는 역할을 하던 태반을 아이를 품고 있던 제 모습에도 함께 넣었어요. 그렇게 마지막에 ‘보이지 않는 공급과 보호, 그리고 연결’이라는 이미지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작품 속 현실적이면서 유머러스한 부분들이 흥미로워요. 이러한 일상의 언어가 작품에 들어오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작품에는 “오늘 반찬 뭐야?”, “또 엄마들이랑 커피숍?” 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문장이 등장해요. 아주 사소하고 자연스럽게 오가는 말이지만, 거기에 가정 내 역할과 감정이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여기에 유머를 섞는 건 중요한 요소예요. 제 작업은 굉장히 구조적이고 계산된 형태를 띠지만, 그 안에 블랙코미디나 일상의 유머가 함께 들어가죠. 그 진지함과 유머 사이에서 생기는 텐션을 관람객들이 좋아하시는데, 이건 어머니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어머니는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농담을 던지는 분이셨거든요. 힘든 현실을 유머로 견디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제게도 스며들어, 단순한 장난이라기보다 삶의 압박이나 관계의 긴장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려보내는 장치로 작동하게 된 것 같아요. 작업하며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요즘은 AI도 그렇고, 이미지나 정보가 너무 빠르게 생산되고 넘쳐나는 시대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무엇이 중요한지’ 계속 보려고 해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그 안에 있는 본질이 무엇인지, 그걸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더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 작업도 결국은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거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소해 보이는 일상이라도 그 안에 깃든 감정이나 의미를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오랜 시간 작업을 이어온 작가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있다면요? 저 자신에게 ‘조금 더 여유롭고 덜 치열해도 된다’는 말을 하곤 해요. 저는 회사에 다닐 때는 회사 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엔 아이를 키우며 그 시기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왔어요. 그래서인지 작가로서도 스스로를 지나치게 몰아붙이기보다, 작업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태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예술을 사랑하는 만큼 아끼는 마음이랄까요. 그 마음 덕분에 다른 일을 병행하면서도 작업을 계속 이어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요즘 자신에게 가장 자주 건네는 말은 ‘조금 더 여유를 가져도 괜찮다’는 다짐입니다. 앞으로 작업이나 삶의 방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계속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예술가라는 직업 자체에 너무 얽매이지 않으려 하고요. 한때는 불안해서 계속 새로운 작업을 해야 할 것 같고, 앞날에 대한 고민도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무엇보다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삶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 제가 해온 작업도 결국은 삶에서 나온 거거든요. 아이를 낳아 키운 경험과 가족과의 관계, 회사 생활 같은 것이 차곡차곡 쌓여 작업이 됐죠. 그래서 앞으로도 특별한 무언가를 억지로 끄집어내기보다, 지금처럼 삶을 성실히 살아내면서 작업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도록 두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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