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영화 ‘짝사랑 세계’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전제 조건으로 삼되, 이를 비극으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은 이미 끝났어야 할 시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설정을 통해, 살아 있다는 감각 자체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이 출발점에서부터 작품은 감정의 방향을 명확히 설정한다. 남겨진 것이 아니라 머물러 있는 존재들, 그리고 닿지 않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잔향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각본을 맡은 사카모토 유지는 그간 '괴물',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등을 통해 관계의 미묘한 균열과 감정의 굴레를 집요하게 탐구해왔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결을 따라가며,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어떻게 축적되고 변형되는지를 서사로 치환한다. 인물들은 무엇인가를 잃었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전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 고립된다.
연출을 맡은 도이 노부히로는 감정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빛과 시간,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을 통해 서사를 구축한다. 노을이 번지는 해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공간, 그리고 멈춘 듯 이어지는 생활의 패턴은 인물들의 상태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감정을 강조하기보다는 흘려보내는 방식이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세 주인공 미사키, 유카, 사쿠라는 각기 다른 감정의 온도를 지닌다. 히로세 스즈가 연기하는 미사키는 가장 바깥을 향한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스기사키 하나의 유카는 내면으로 침잠하는 성향을 보인다. 키요하라 카야의 사쿠라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인물로 기능한다. 이 삼각 구조는 단순한 캐릭터 분배가 아니라 감정의 흐름을 분산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들이 공유하는 일상은 지극히 평범하다.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영화를 보고, 같은 공간에서 잠든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은 결코 안정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시간이 쌓여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성장의 흔적처럼 보이는 ‘키를 재는 행위’조차 실제 변화와는 무관한 의식으로 남는다.
특히 어린 시절과 현재를 병치한 이미지는 영화가 시간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과거는 회상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동시에 존재한다. 이는 기억이 아니라 상태에 가깝다. 인물들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안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설정은 ‘짝사랑’이라는 제목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여기서의 짝사랑은 특정 인물에 대한 감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계 자체를 향한 일방적인 감정, 닿지 않는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애정이 확장된 개념으로 작동한다. 사랑은 존재하지만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는 정체된 구조에 균열을 만든다. ‘마음을 전하면 돌아갈 수 있다’는 설정은 희망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을 제시한다. 말할 수 없는 존재에게 ‘전달’이라는 행위는 구조적으로 모순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 모순은 영화의 긴장을 형성하는 중요 요소다. 인물들은 방법을 찾기보다 감정을 쌓아간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해결의 가능성보다 감정의 축적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이는 서사를 앞으로 밀어붙이기보다, 같은 자리를 맴돌며 깊이를 더하는 방식이다.
요코하마 류세이가 연기하는 텐마의 존재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 고리로 기능한다. 그는 세 인물을 기억하는 유일한 인물이며, 동시에 그 기억이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인물이다. 그의 시선은 영화에서 ‘잊히지 않는 것’의 의미를 확장한다.
피아노 앞에 앉은 텐마의 모습은 감정을 언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음악은 영화에서 중요한 매개다. 직접적인 접촉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소리는 유일하게 경계를 넘을 가능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 또한 완전한 전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스틸에서 포착된 도로 한복판의 장면은 영화의 이미지를 압축한다.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결코 섞이지 못하는 존재들, 동일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다른 세계에 속한 상태가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이 장면은 설정을 설명하지 않고도 인물들의 감정을 명확히 전달한다.
또한 작품은 감정을 과잉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표현과 여백을 통해 관객이 스스로 감정을 채워 넣도록 유도한다. 이는 사카모토 유지 특유의 방식이며, 동시에 도이 노부히로의 연출이 이를 안정적으로 받쳐준다.
‘짝사랑 세계’는 상실을 다루지만, 상실 이후의 상태에 더 집중한다. 잃어버린 것보다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끝까지 따라간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형태만 바뀐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정서는 ‘위로’에 가깝지만, 그것이 즉각적인 치유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바라보게 만든다. 이는 관객에게 편안함보다는 잔잔한 불안을 남긴다.
동시에 작품은 청춘 영화의 스토리를 띄지만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빛나는 순간, 함께 달리는 장면, 웃음과 일상의 교차는 익숙한 장치들이지만, 영화에서는 그것들이 도달할 수 없는 상태와 결합되며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결국 ‘짝사랑 세계’는 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이 곧 무의미를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닿지 못하기 때문에 더 오래 지속되는 감정, 끝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변형되는 감정이 영화의 중심을 이룬다.
작품은 관객에게 명확한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이 남는 방식 자체를 체험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잔향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6월 24일 개봉.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