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6월이 시작됐다. 늦은 봄보다 이른 여름이란 말이 좀 더 어울리는 시기다. 여름이 다가올수록 옷은 점점 단순해진다. 반팔 티셔츠 한 겹으로 하루를 보내는 게 익숙해지는 요즘, 계절의 재촉으로 옷차림은 점점 가벼워진다.
해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면 옷장 한쪽에 걸린 수트를 한 번쯤 꺼내 보게 된다. 재작년 구입한 린넨 소재의 수트다. 약간의 초록빛이 감도는 밝은 회색. 처음 매장에서 봤을 때는 그 색이 마음에 들었다. 회색이지만 무겁지 않았고, 초록빛이지만 튀지 않았다. 여름 햇살 아래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어울릴 것 같은 색이었다.
사실 입을 기회는 많지 않다. 여름일수록 편한 옷, 시원한 옷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일상에 수트가 필요한 순간은 거의 없다. 하지만 결혼식장에 가거나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나는 자리, 사회를 맡은 행사에 참석하는 날이면 늘 이 수트를 찾게 된다. 옷장 안에 더 자주 손이 가는 옷도 많지만 특별한 순간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이 수트에 손이 간다.
린넨 소재 특유의 구김은 흥미롭다. 처음에는 단정하게 다려져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주름이 생긴다. 그런데 그 구김이 오히려 멋이 된다. 지나치게 완벽하려 하지 않는 태도, 격식을 갖추되 숨 막히지 않는 여유가 느껴진다. 여름 수트가 (필자에게) 사랑받는 이유도 어쩌면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딱딱함과 편안함 사이, 격식과 자유로움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찾아주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계절에 상관없이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가 많았다. 무더운 여름에도 재킷을 입고 넥타이를 매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복장은 훨씬 자유로워졌다. 요즘은 회사에서도 캐주얼 복장이 보편화됐고 일상과 업무의 경계도 이전보다 느슨해졌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흐름은 자연스러운 변화다. 누구도 한여름에 불필요한 불편을 감수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편안함이 중요한 가치가 된 만큼 우리는 너무 쉽게 ‘편한 것’만을 기준으로 삼게 된 것은 아닐까?
옷은 단순히 몸을 가리는 기능만 하는 물건이 아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자리에 왔는지,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은근하게 보여주는 언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요한 자리에 갈 때 우리는 여전히 옷장 앞에서 잠시 고민한다.
결혼식장을 떠올려 본다. (요즘 결혼식 참석할 일이 많다) 신랑과 신부에게 그날은 인생에서 몇 번 없는 특별한 순간이다. 물론 복장 규정이 엄격한 시대는 지났다. 하지만 하객이 조금 더 단정한 옷차림을 고민하는 이유는 규칙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이다. ‘당신의 중요한 날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는 메시지를 옷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옷을 갖춰 입는다는 것은 예절이 아니라 배려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린넨 수트는 흥미로운 옷이다. 여름과 예의 사이에서 적절한 해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땀을 참으며 무거운 정장을 고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친 편안함으로 흐르지도 않는다. 계절을 존중하면서도 자리를 존중하는 옷. 시원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단정함을 잃지 않는 옷. 린넨 수트 한 벌을 집어드는 손에는 생각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이 옷이 ‘노력한 흔적’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중요한 자리에 가기 전 재킷을 꺼내고, 셔츠를 고르고, 구두를 손질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번거롭다. 하지만 그 번거로움은 상대를 향한 존중의 표현이기도 하다. 시간을 들였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가 된다. 우리는 종종 결과보다 과정에서 진심을 읽는다.
가격 대비 성능이나 활용도를 따지는 건 물건을 살 때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의 물건에 다른 의미 혹은 특별한 질문이 깃들기도 한다. "이 물건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가?" "어떤 태도를 갖게 하는가?"
린넨 수트가 필자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혹시 이게 아닐까 싶다. '여름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편안함 속에서도 최소한의 격식과 예의를 잊지 않도록 하는 마음가짐'.
여성경제신문 권혁주 쇼호스트
kwonhj1002@naver.com
권혁주 쇼호스트·방송인
동국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한 후 SBS강원(G1), CJ헬로비전 등에서 아나운서로 방송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CJ ENM, 현대홈쇼핑+, 더블유쇼핑 등에서 홈쇼핑 및 라이브커머스 쇼호스트로서의 방송 경력을 거쳐 현재는 프리랜서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방송활동에 겸하여 서촌에서 ‘이상서전’이라는 독립서점을 운영하며 매주 한 권의 책을 큐레이션하는 독특한 콘셉트로 정체성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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