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실손의료보험과 건강보험 본인부담상한제 간 ‘이중 지급’ 문제가 수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이를 조정할 사후 정산 체계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대법원은 이미 본인부담상한제 환급금은 실손보험 보상 대상이 아니라는 취지의 판단을 내렸지만, 건강보험공단과 보험사 간 정보 공유 및 직접 정산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으면서 중복 지급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건강보험 본인부담상한제는 연간 의료비 본인부담금이 일정 기준을 초과할 경우 건강보험공단이 초과 금액을 환급해 주는 제도다. 과도한 의료비로 인한 가계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도입된 대표적인 의료복지 제도로, 소득 수준에 따라 개인별 상한액이 다르게 적용된다.
환수 어려워
취지 좋은 본인부담상한제는 시행 초기부터 한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바로 실손의료보험과의 정산 시점 차이다. 실손의료보험은 가입자가 실제 부담한 의료비를 기준으로 보험금을 지급하는 구조다.
실손보험은 병원 진료 직후 비교적 빠르게 보험금이 지급되지만, 본인부담상한제 환급은 연간 의료비를 기준으로 다음 해 8월 이후에나 확정된다. 즉 실손보험금은 먼저 지급되고 건강보험 환급은 뒤늦게 이뤄지면서, 환급금과 실손보험금까지 받게되는 ‘이중 지급’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입자는 먼저 실손보험금을 수령한 뒤 뒤늦게 건강보험공단 환급이 발생하면 보험사로부터 환수나 재정산 요구를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소득 수준에 따른 본인부담상한액이 300만원인 가입자가 병원비로 500만원을 지출했다고 가정할 경우, 초과한 200만원은 건강보험공단이 사후 환급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가입자의 실제 부담은 300만원이지만, 실손보험은 환급 이전 금액인 500만원을 기준으로 보험금을 먼저 지급하는 구조다.
보험업계는 환급받은 200만원 부분에 대해선 실손보험 보상 대상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실손보험금과 환급액이 각각 다른 시점에 지급되면서 혼란이 발생했다. 실제 현장에서는 환수 안내와 재정산 절차가 수개월에서 수년 뒤 이뤄지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조는 본인부담상한제가 도입된 이후 실손보험 가입자들과 보험사 간 분쟁으로 이어졌다. 2009년 9월 이전 판매된 1세대 실손보험 약관에는 ‘본인부담상한제 환급금은 실손보험 지급 대상이 아니’라는 내용이 명시돼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입자들은 “약관에 없는 사유로 보험금 지급을 제한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보험사들은 “실손보험은 실제 손해만 보상하는 상품인 만큼 환급 예정 금액은 보상 대상이 아니”라고 맞섰다.
실손 먼저 지급·건보는 뒤늦게 환급
부당 이중수령 반복에 수천억원 누수
실제로 하급심 판단도 엇갈렸다. 본인부담상한제를 둘러싼 실손보험 관련 소송 23건 가운데 보험사 승소는 11건, 패소는 12건으로 집계됐다. 일부 재판부는 약관상 명확한 제외 규정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가입자 손을 들어줬고, 반대로 일부는 실손보험의 구조상 환급 예정 금액까지 보상하는 것은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논란은 2024년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사실상 방향이 정리됐다. 대법원 1부는 현대해상과 1세대 실손보험 가입자 간 보험금 청구 소송에서 “국민건강보험법상 본인부담상한제를 통해 환급받은 초과 의료비는 실손보험 보상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본인부담상한액을 초과한 금액은 가입자가 최종적으로 부담하는 손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판결 이후 보험업계는 본인부담상한제 환급금에 대한 실손보험 환수와 재정산 근거가 명확해졌다고 보고 있다. 반면 일부 소비자단체와 가입자들은 “실손보험 약관에 없는 내용을 사후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며 반발했다.
보험업계와 달리 소비자들은 이 문제를 ‘부당 이중 수령’으로만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상당수 가입자는 본인부담상한제 환급 구조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실손보험금을 먼저 청구하는 경우가 많고, 실손 선지급·건보 후환급이라는 제도 구조 자체가 혼선을 만든다는 지적이다.
실제 환급 시점이 수개월에서 1년 이상 늦어지다 보니 가입자 입장에서는 이미 끝난 줄 알았던 보험금이 뒤늦게 다시 정산 대상으로 바뀌는 상황이 돼 버리는 것이다.
특히 고령층이나 장기 입원 환자들에게는 환수 절차 자체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보험사로부터 환수 안내를 받더라도 정산 구조를 이해하기 어렵고, 추가 서류 제출이나 반환 절차 등을 직접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후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 역시 본인부담상한제 환급금은 실손보험 지급 대상이 아니라는 해석을 내놓으면서 현재는 보험업계 논리에 무게가 실렸다.
문제는 여전히 사후 정산 논란이 해결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감사원과 보험업계는 건강보험공단 환급금과 실손보험금 간 중복 지급 규모가 수천억원대에 달한다며 제도 개선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2년까지 본인부담상한제 환급금과 실손보험금을 중복 수령한 가입자는 약 94만3000명, 규모는 858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감사원은 이 같은 중복 지급이 해소될 경우 실손보험 손해율이 평균 2.3%포인트 낮아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보험료 역시 연간 2232억원, 계약 건당 평균 6400원가량 인하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대법 “실손 보상 대상 아냐”
법리 정리됐지만 현장은 혼선
보험업계는 이를 전체 가입자의 보험료 부담 문제로 보고 있다. 일부 가입자의 이중 수령이 실손보험 손해율 상승으로 이어지고, 결국 전체 가입자의 보험료 인상 압박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국회에서도 관련 제도 개선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 국민의힘 이헌승·추경호 의원 등은 건강보험공단과 보험사 간 사후 정산 근거를 담은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을 각각 발의했다. 개정안에는 공단과 보험사가 환급 정보를 연계해 중복 지급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직접 정산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하지만 관련 입법 논의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보험사가 건강보험공단 환급 정보를 직접 확인할 권한이 없는 데다, 개인정보 공유 문제와 시스템 구축 문제 등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실제 현재까지도 상당수 보험사는 가입자가 사후적으로 환급금을 수령하면 개별적으로 환수와 재정산 절차를 진행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관련 제도 개선 논의가 실제 입법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건강보험공단과 보험사 간 직접 정산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개인정보 제공 범위와 정보 활용 목적 등을 둘러싼 법적 정비가 필요하다. 공보험과 민간보험 간 정보 연계 자체에 대한 거부감도 적지 않아 제도 설계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그럼에도 보험업계는 현행 구조를 더 이상 방치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대법원과 금융감독원 판단으로 법리 기준이 사실상 정리된 만큼, 이제는 중복 지급을 막기 위한 정산 시스템 구축과 입법 논의가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 최근까지도 보험업계는 본인부담상한제 환급금 문제를 실손보험 손해율 악화와 보험료 상승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하고 있다.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건강보험공단과 보험사 간 직접 정산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입법도 불투명
보험업계에서는 소비자가 중간에서 환급·환수 절차를 직접 밟는 대신, 공단과 보험사가 시스템 내에서 자동으로 정산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실제 보험업계 관계자는 “실손보험과 본인부담상한제가 각각의 취지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를 배제한 직접 정산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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