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 화단서 명성 쌓은 동포 2세…40여년간 '5월 광주' 작업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1980년 5월 어느 날. 일본 오사카에서 활동하던 31세 화가 김석출의 시선은 '광주 사건'을 전하는 기사에 꽂혔다.
"이제 그림을 그만둘까 생각했을 때,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어요. 어느 신문을 보든 간에 뉴스가 나왔지요. 일본에 있는 조선 사람들이 차별받고 제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이 괴로웠는데, 한국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서슬 퍼런 군부 통제 아래 국내 화단이 침묵하던 시절, 그는 거침없이 5·18 광주의 참상을 화폭에 담아냈다.
끌려가는 젊은이들을 담아낸 대표작 '1980.5.27'은 이듬해 4월 재일동포 작가들의 연합전시인 제1회 고려미술전을 통해 처음 일반에 공개됐다.
그로부터 40여년간 이어진 '5월 광주' 연작은 2024년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에서 열린 첫 국내 개인전 '두드리는 기억'을 통해 국내에도 상세히 소개됐다.
1일 연합뉴스와 전화로 만난 김석출(74) 작가는 "당시엔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거창한 생각보다, 어떻게든 그려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최근 불거진 스타벅스 코리아의 5·18 '탱크데이' 마케팅 사태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다만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국내 일각의 움직임에 대해선 "역사적으로 다 밝혀진 것인데 안타깝다"며 "내 작업은 모두 실제로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토대로 그린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전에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 친구 중 하나도 5·18 전람회에 끝내 안 오더라고요. 제게 계속 광주를 그리면 한국에 있는 누나에게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고한 사람도 있었어요."
재일동포 2세인 작가인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오사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사실주의 화단에서 명성을 쌓아 왔다.
1939년 경북 군위에서 두 딸을 남겨둔 채 징용공으로 일본에 온 아버지,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이국땅에서 7남매를 홀로 키운 어머니, 북송선을 탄 뒤 돌아오지 못한 둘째 형…….
광주민주화운동뿐 아니라 재일동포의 굴곡진 삶, 북송선 문제, 베트남 전쟁 등 그의 작업이 디아스포라(이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유다. "팔기 위해 그린 그림들이 아니었어요. 생계는 초상화를 그려 해결했어요."
현실을 응시하는 그의 작업에 쏠리는 감시의 눈초리도 심했다.
1980년 총련이나 민단과 관계없이 하나 된 미술전람회를 하자는 생각에 고려미술회를 만들었지만, 주변의 방해가 이어졌다. 그는 "전시할 때마다 안기부 사람이 왔다"며 "함께 그리던 사람 중에 스파이로 밝혀진 사람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2024년 김 작가의 개인전을 기획한 김희랑 5·18기록관 연구실장은 "김석출은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로서 5·18을 자신의 역사로 받아들였고, 그 기억을 오랫동안 작품으로 남겼다"며 "경계를 넘어선 증언이자 연대의 기록"이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5·18을 왜곡하거나 폄하하려는 움직임이 반복되는 때일수록 김석출의 작업은 더 중요해진다"며 "40여 년 동안 같은 제목으로 작품을 이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망각과 왜곡에 맞서는 실천"이라고 강조했다.
작가의 붓은 멈추지 않고 있다.
작가는 현재 유관순 연작을 작업 중이다. 한국에 유관순을 그리는 작가가 없다며 그림책 삽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으로 시작된 작업은 유관순 연작으로 이어졌다. "일본에 '유관순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그려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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