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그랑프리로 향하는 길은 한국 드라이버에게 아직 한 번도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
유럽 카트와 주니어 포뮬러, 팀 네트워크, 스폰서십, 슈퍼 라이선스 포인트까지 모든 조건이 유럽 중심으로 짜인 무대에서 한국 드라이버가 자리를 잡기는 쉽지 않다. 그런 그 길 위에 지금 2008년생 이규호(엘리트 모터스포츠)가 서 있다.
이규호는 올 시즌 유럽 주니어 포뮬러 주요 카테고리인 2026 GB3 챔피언십에 출전하며 한국인 최초 F1 드라이버를 향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아직 시즌 초반이다. 그러나 ‘실버스톤’에서 보여준 가능성과 ‘스파 프랑코르샹’에서 남긴 투혼은 이규호가 왜 한국 모터스포츠의 다음 세대로 주목받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이규호의 출발은 카트였다. 2017년 카트에 입문한 그는 국내 카트 무대에서 성장했고 이후 RMC 그랜드 파이널과 FIA 카팅 아카데미 트로피 등 국제 대회에 참가하며 경험을 넓혔다. 2024년에는 국제 카트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풀 시즌을 소화했고, FIA 카팅 월드컵 OK-N 부문 우승을 통해 존재감을 키웠다. 한국 드라이버가 국제 카트 무대에서 거둔 이 성과는 포뮬러카 진출의 발판이 됐다.
이규호는 중동 F4, 동남아 F4, 스페인 F4 챔피언십, 마카오 F4 월드컵 등을 거치며 포뮬러카 적응 과정을 밟았다. 여러 대회에서 ‘톱10’ 성적과 루키 부문 성과를 남기며 카트에서 포뮬러카로 이어지는 전환기를 빠르게 통과했다. 그리고 2026년에는 엘리트 모터스포츠 소속으로 GB3 챔피언십에 올라섰다.
GB3 챔피언십은 영국과 유럽 주요 서킷을 무대로 열리는 주니어 포뮬러 시리즈다. F3, F2 등 상위 카테고리 진출을 목표로 한 젊은 드라이버들이 경쟁한다. 실버스톤, 스파 프랑코르샹, 헝가로링처럼 F1을 개최하는 서킷에서 실력을 검증받을 수 있다. 이규호에게 GB3는 단순한 한 시즌이 아니라 한국 드라이버가 유럽 포뮬러 피라미드 안에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무대다.
그 첫 테스트는 지난 4월 영국 실버스톤에서 열렸다. 이규호는 GB3 데뷔 무대였음에도 예선부터 톱10에 진입하며 현지 관계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레이스1에서 7위, 레이스2에서 10위로 출발한 그는 결선에서 순위를 끌어올리며 6위까지 올라섰다. 데뷔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의미 있는 출발이었다.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장면은 레이스3였다. 상위 12대를 역순으로 출발시키는 리버스 그리드 방식에서 이규호는 과감한 추월을 이어가며 선두권 경쟁에 뛰어들었다. 마지막까지 포지션 경쟁을 펼친 그는 실제 결승선을 전체 2위로 통과했다. 경기 후 포메이션 랩 구역 규정 위반에 따른 5초 페널티로 공식 순위는 9위로 정정됐지만 온트랙에서 보여준 주행 경쟁력은 결과표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실버스톤은 이규호에게 ‘속도가 통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무대였다.
벨기에 스파 프랑코르샹에서 열린 GB3 챔피언십 2라운드는 다른 의미의 시험이었다. 이규호는 스파 첫 주행임에도 금요일 오전 연습 주행 세션에서 모두 톱10에 이름을 올렸다. 공식 연습 주행에서는 선두와 0.1초 차이인 전체 2위를 기록했고 이어진 세션에서도 4위에 오르며 빠른 적응력을 보여줬다. 낯선 서킷에서도 곧바로 상위권 기록을 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한 강점이었다.
그러나 금요일 오후부터 경주차에 엔진 계통 문제가 발생하면서 흐름이 급격히 흔들렸다. 밸런스가 무너진 상황에서 예선은 각각 14위와 12위에 머물렀다. 레이스1에서는 오프닝 랩부터 4대를 추월해 10위까지 올라섰지만 세이프티카 해제 직후 엔진 출력 손실로 리타이어했다. 속도는 있었지만 결과가 따라오지 않은 레이스였다.
레이스2의 상황은 더 가혹했다. 포메이션 랩 중 동일한 엔진 문제가 다시 발생했고 이규호는 피트로 복귀해야 했다. 팀 크루가 긴급 수리에 나서는 동안 대열은 이미 출발했다. 결국 그는 최후미에서 홀로 레이스를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피트 스타트와 다름없는 불리한 조건에서도 끝까지 주행을 이어갔고 3개 순위를 끌어올려 19위로 완주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아쉬운 주말이었다. 그러나 반복된 기계적 문제 속에서도 레이스를 끝까지 마친 것은 팀에 중요한 주행 데이터와 경험을 남긴 장면이었다. 스파 프랑코샹은 이규호에게 ‘결과가 무너진 날에도 레이스를 끝까지 붙잡는 법’을 확인한 무대였다.
경기 후 이규호는 “주말 초반 선두와 0.1초 차이라는 기록을 모니터에서 봤을 때, 제 스피드가 이 넓은 세계 무대에서도 통한다는 확신이 생겼다”며 “예상하지 못한 엔진 고장으로 차가 멈췄을 때는 속상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고 돌아봤다.
이어 그는 “피트 맨 끝에서 출발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한국에서 저 하나만 바라보며 모든 것을 희생하고 계신 부모님이 떠올랐기 때문”이라며 “아무것도 없는 저를 믿고 먼 타국으로 보내주신 부모님께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다”고 의지를 다졌다.
이규호의 도전은 혼자만의 여정도 아니다. 그는 2026년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 트라젝토리 프로그램에 포함되며 한국 드라이버의 글로벌 모터스포츠 진출 가능성을 넓히는 프로젝트 안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MIK와 에이전트 계약을 체결해 후원과 매니지먼트 기반을 다져가고 있다. 유럽 주니어 포뮬러 무대에서 필요한 것은 속도뿐 아니라 이를 지속할 수 있는 지원 구조다. 이규호의 도전이 더 큰 의미를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즌 초반 이규호가 남긴 것은 단순한 성적표가 아니다. 실버스톤에서는 데뷔전부터 선두권 페이스를 증명했고 스파에서는 불운 속에서도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는 회복력을 보여줬다. 아직 갈 길은 멀다. 하지만 F1으로 향하는 길은 원래 빠른 한 번의 결과가 아니라 낯선 서킷과 불운한 주말을 통과하며 쌓아 올리는 과정이다.
이규호의 다음 무대는 7월 4일부터 5일까지 헝가리 헝가로링 서킷에서 열린다. 헝가로링 역시 F1 그랑프리가 열리는 서킷이다. 실버스톤에서 가능성을 확인했고, 스파 프랑코샹에서 투혼을 남긴 이규호가 헝가로링에서는 어떤 답을 내놓을지 관심이 모인다.
한국인 최초 F1 드라이버라는 목표는 아직 먼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길의 첫 문을 두드려야 한다. 2008년생 이규호는 지금 그 문 앞에서 결과보다 먼저 속도와 의지를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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