텀블러의 역설[최종수의 기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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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블러의 역설[최종수의 기후이야기]

이데일리 2026-06-01 05:0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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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 환경칼럼니스트] 최근 한 커피전문점의 텀블러 판촉 행사가 거센 비판을 받았다. 특정 역사적 기념일에 군사적 폭력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과 국가폭력 피해자의 죽음을 연상시킬 수 있는 문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아픈 역사와 맞닿아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해당 업체는 문구를 수정한 뒤 결국 행사를 중단하고 사과했다. 이번 논란의 본질은 역사적 감수성의 부재에 있다. 하지만 이번 논란은 또 다른 질문을 남긴다. 왜 하필 논란의 물건은 텀블러였을까. 친환경 생활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텀블러는 언제부터 공격적인 마케팅 상품이 되었을까.

서울에서 열린 카페디저트페어에서 고객이 전시된 텀블러를 고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텀블러는 한때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의 소박한 실천을 상징했다. 일회용컵 대신 텀블러를 챙기는 일은 일상 속 환경 의식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금의 텀블러는 친환경 실천의 도구를 넘어 소비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 디자인이 나오고 캐릭터가 붙고 한정판이라는 이름으로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텀블러는 이제 음료를 담는 그릇이라기보다 취향을 드러내는 상품이 됐다.

숫자를 보면 이런 변화는 더 뚜렷해진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판촉 행사로 논란이 된 해당 커피전문점은 최근 3년간 587종의 텀블러를 출시해 약 940만 개를 판매했고 258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2019년부터 2022년 9월까지 판매한 텀블러도 1126만 개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한 회사의 판매량만 봐도 텀블러 소비 규모가 작지 않다. 여기에 다른 커피전문점과 온라인몰, 생활용품 매장 등까지 포함하면 우리 사회에 유통된 텀블러는 훨씬 많을 것이다. 다만 텀블러의 전체 생산·판매 규모와 실제 사용 실태를 한눈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친환경을 내세운 상품이 널리 유통되고 있지만 이들 제품이 얼마나 오래 쓰이고 있는지는 여전히 가늠하기 어렵다.

텀블러의 본래 취지는 일회용컵을 줄이고 오래 쓰는 데 있다. 그러나 그런 물건이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반복 구매의 대상으로 바뀐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한정판이라는 이름으로 구매를 자극하고 시즌 상품으로 교체를 유도하며 기념품이라는 명목으로 대량 배포된다면 텀블러의 친환경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사용이다. 쓰이지 않는 텀블러는 일회용컵을 줄이는 데 기여하지 못한 채 처리해야 할 물건만 하나 더 늘릴 뿐이다.

자원순환에 앞장서야 할 정부 부처의 텀블러 배포 관행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회 자료를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5년까지 정부 부처가 기념품으로 구입한 텀블러는 42만 개에 가까웠고 여기에 70억원이 넘는 예산이 쓰였다. 친환경을 내세운 행사에서 텀블러를 나눠주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 있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집이나 사무실에 쓰지 않는 텀블러가 쌓여가는 현실에서 새 텀블러를 나눠주는 일이 과연 친환경 실천인지 되물어야 한다.

기업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텀블러 판매량을 친환경 성과처럼 포장해서는 안 된다. 많이 팔았다는 사실은 매출 실적일 수는 있지만 곧바로 환경 성과가 되지는 않는다. 기업이 더 중요하게 보여줘야 할 것은 판매량이 아니라 제품이 얼마나 오래 쓰일 수 있는지, 생산과 폐기 과정에서 환경 부담을 얼마나 줄였는지다. 텀블러가 친환경 제품이 되려면 디자인보다 내구성이 먼저다.

소비자에게도 돌아볼 지점은 있다. 새 텀블러를 고르기 전에 지금 가진 텀블러를 얼마나 더 쓸 수 있을지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쁜 텀블러를 사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다만 친환경이라는 이유로 필요하지 않은 텀블러를 또 산다면 그것은 환경 실천이라기보다 소비를 정당화하는 일에 가까워진다.

이번 텀블러 판촉 논란은 역사적 감수성의 문제로 시작됐지만 우리 사회의 친환경 소비가 어떤 방식으로 소비 문화에 흡수됐는지도 보여준다. 친환경은 덜 사고 오래 쓰고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텀블러 하나가 친환경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새 텀블러를 하나 더 사기 전에 이미 가진 텀블러를 다시 꺼내 쓰는 습관부터 회복해야 한다. 텀블러의 가치는 새것일 때가 아니라 오래 쓰여 낡아갈 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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