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매일 쓰이는 필수의약품 공급 불안이 반복되면서 국내 약가 제도의 구조적 한계가 다시 드러나고 있다. 오래된 필수약은 낮은 약가 탓에 생산을 유지하기 어렵고, 혁신 신약은 충분한 가치 보상이 부족해 환자 접근성이 늦어지는 이중 문제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어서다.
31일 업계에 따르면 의료 현장에서 가장 큰 우려를 낳은 사례는 로라제팜 성분의 아티반주사가 주목받고 있다. 경련이 멈추지 않는 응급 소아 환자 등에게 쓰이는 필수의약품이지만, 기존 생산 업체가 수익성 저하와 노후 설비 등을 이유로 생산 중단 계획을 밝히면서 공급 공백 우려가 커졌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삼진제약을 새 생산 업체로 지정했지만 변경허가 등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현장 불안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생리식염주사액, 에피네프린주사액, 리도카인 주사제, 항생제, 마취제 등 응급실·중환자실·수술실에서 기본적으로 쓰이는 의약품 상당수가 극소수 업체에 생산을 의존하고 있다. 동일 성분·제형 퇴장방지의약품 374개를 조사한 결과 231개 품목, 61.8%가 단일 제조사에 의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조사가 생산을 멈추면 대체 공급망이 곧바로 흔들릴 수 있는 구조다.
취약한 공급망의 배경에는 장기간 이어진 저약가 구조가 있다. 퇴장방지의약품의 약 30%는 5년 이상 상한금액이 동결됐고, 20년 넘게 약값이 오르지 않은 품목도 57개에 달했다. 감기·발열·통증 등에 쓰이는 알파아세트아미노펜정은 2000년 퇴장방지의약품 지정 이후 26년간 상한금액이 11원에 묶여 있다. 원료비, 인건비, 물류비, GMP 유지 비용은 오르는데 약값은 장기간 정체되면서 생산 유인이 약해진 셈이다.
제약업계에서는 오래된 제네릭 의약품일수록 누적된 약가 인하와 초저가 구조로 수익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대형 제약사는 다른 품목 수익으로 버틸 수 있지만, 중소 제약사는 적자 품목 생산을 계속 유지하기 쉽지 않다. 정부가 필수의약품을 지정해도 실제 생산은 개별 기업의 경영 판단에 의존하는 구조라면 공급 중단 위험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공급 불안은 소아·신생아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쇼크 상태의 신생아와 소아 중환자의 혈압 유지에 사용되는 코티소루주도 생산 중단 우려가 제기됐다. 성인 약으로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신생아·소아 의약품 특성을 고려하면, 필수약 부족은 단순 품절을 넘어 치료 지연과 환자 안전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정부도 대응책을 내놨다. 보건복지부는 퇴장방지의약품 약가 기준을 최대 10% 인상하고, 직권 지정 근거와 정책 가산 제도를 도입해 생산 중단 위험 품목 관리를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다. 공급 중단 우려 품목을 생산하는 기업에 생산시설·장비 구축 비용을 지원하는 예산도 36억원 규모로 늘렸다.
다만 의료계와 제약업계에서는 단기 약가 인상과 일회성 지원만으로 누적된 구조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워낙 낮은 약값에 비해 인상 폭이 제한적인 데다 원료의약품 상당수를 중국과 인도에 의존하는 공급망 구조도 여전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필수의약품을 경제성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상시 공급망 관리 체계로 다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약가 제도의 또 다른 축인 신약 접근성 문제도 과제로 떠올랐다.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는 정부의 약가제도 개편안이 혁신형 제약기업에 대한 지원 방안은 담았지만, 국내 개발 신약 자체에 대한 직접 보상 체계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제네릭 약가 산정률 인하가 국내 제약사의 채산성과 연구개발 투자 여력에 미칠 영향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환자단체와 제약업계는 희귀질환 치료제 신속등재 제도의 실효성도 강조하고 있다. 정부는 급여 평가와 협상 절차를 줄여 100일 이내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등재가 빨라져도 실제 환자가 치료제를 사용할 수 있는 시점이 늦어지면 제도 효과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희귀질환·항암제·첨단바이오의약품처럼 환자 수가 적고 장기 데이터 확보가 어려운 신약은 기존 비용효과성 평가만으로 가치를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전문가들은 필수의약품 공급안정, 신약 접근성, 건강보험 재정 관리를 함께 보는 약가 체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퇴장방지의약품과 국가필수의약품은 공급망 안정성을 기준으로 별도 관리하고, 혁신 신약은 임상적 가치와 환자 접근성을 반영한 평가 체계를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값을 낮게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건보 재정을 지킬 수 있어도 의료 현장의 안전망은 흔들릴 수 있다. 필수약과 신약 모두에서 약가 제도의 재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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