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에 따르면 장재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이 별세했다. 고인은 1996년 국정감사 당시 외환위기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경고했던 인물로 기억된다.
호남의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 가문에서 고인은 태어났다. 임시정부 외무부장을 역임한 큰아버지 장병준 선생, 부친 장병상 선생, 광복군 전남지구대 참모장이자 제헌 국회의원이었던 작은아버지 장홍염 선생까지 온 집안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주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1956년 7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며 공직 생활이 시작됐다. 국세청에서 근무하다 1973년 차장으로 승진했고, 1979년에는 한국주택은행장 자리에 올랐다. 서울대 법대 강사로 10년간(1985∼1995년)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정계 입문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이뤄졌다.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첫 금배지를 달았고, 이후 서울 서대문 지역구에서 15·16대 총선을 연속 석권하며 3선 고지를 밟았다. 산업자원부 장관직은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수행했다.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긴 시기도 있었으나 원내 교섭단체 구성을 돕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 평생 'DJ(김대중)맨'으로 남았다. 정치 입문 직후 민주당 정책위의장에 발탁될 정도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신뢰가 깊었다.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활동하던 1996년 10월,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 국정감사장에서 그의 경고가 울려 퍼졌다. 환율·수출·외채의 연관성을 조목조목 분석하며 외환위기 도래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다. 엔저 현상이 장기화되면서 원화 고평가 상태가 지속되고, 자동차·조선 등 중화학 제품의 수출경쟁력이 급락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금리 인하와 환율 인상을 단기 처방으로 시급히 단행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인위적 환율 방어를 중단하고 환율 상승을 유도해 수출경쟁력을 회복, 경상수지 적자를 축소하자는 제언이었다. 그러나 물가 상승 우려와 기업 환차손을 명분으로 당국은 이를 묵살했다.
1년여가 흐른 1998년 1월, 비상경제대책위 회의석상에서 강만수 당시 재경원 차관이 뒤늦은 고백을 했다. 반도체 호황에 매몰돼 환율 평가 시점을 놓쳤고, 환율 자율조정 건의도 상부에서 거부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모라토리엄 직전에 와서야 고인의 분석이 정확했음이 증명된 셈이다. 회의 종료 후 고인은 "환율과 무역수지는 큰 상관이 없다고까지 강변하더니…"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1999년 초에는 IMF 환란특위 위원장을 맡아 해박한 경제 식견을 발휘했다.
봉급생활자들의 세 부담 완화도 고인이 오랜 기간 천착한 과제였다. 근로소득을 종합소득세에서 분리해 별도 과세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소득세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제동이 걸리며 입법화에는 실패했다.
두 아들은 세계적 석학으로 성장했다. 장남 장하준 교수는 런던대에서 경제학을, 차남 장하석 교수는 케임브리지대에서 과학철학 석좌교수로 활동 중이다. 장하진 전 여성가족부 장관,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 장하원 전 하나금융경영연구소장 등이 조카 항렬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우숙 씨와 2남 1녀(장하준·장연희·장하석), 사위 임수빈 LKB평산 변호사, 며느리 김희정 씨·그레첸 시글러 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일 오전 8시다. (문의 ☎ 02-2227-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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