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없는 자들의 지옥도: 연상호의 ['군체']가 각인시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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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없는 자들의 지옥도: 연상호의 ['군체']가 각인시킨 것

프레시안 2026-05-30 14:43:2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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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군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간 사이의 오해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신경이 서로 연결된 네트워크 망을 구축한다! 나의 생각이 오롯이 타인에게 공유되는 세계라면 그 어떤 갈등으로 인한 폭력도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상상. 심히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군체>(2026)는 이 지점을 파고든다. 갈등과 충돌을 없애기 위해 개성과 욕망, 차이들이 지워진 군체의 모습은 흡사 좀비와 동일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좀비는 식욕으로 인간을 향해 달려들지만 군체는 연결된 네트워크망을 통해 정보를 교류하며 숙주의 통제에 따라 단일하게 움직인다는데 있다. 적어도 조지 A. 로메로 감독이 해석한 좀비는 식욕이라도 남아 있었다. 그 욕망이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인간을 공격하며 좀비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숙주로서의 좀비를 존재하게 했다. 타인을 공격하고 이로써 시스템 전체를 파괴하는 좀비의 폭력성은 때로 자본주의와 소비주의를 비판하는 상징으로 해석되며 자본에 의한 불평등을 해체하는 혁명적 주체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군체>에서의 군체는 그 욕망마저 삭제된 채 숙주의 통제에 철저히 따른다. 주술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신체를 통제해 인간을 노예화 한다는 부두교의 전통에 좀 더 가까운 해석이다.

연상호 감독은 이미 <부산행>(2016)과 <서울역>(2016)을 통해 시스템을 공격하는 좀비의 파국적 상태를 묘사한 바 있다. 두 편의 전작으로 한국 사회에 좀비 장르를 유행시킨 그가 새로운 좀비 유형을 들고 온 것은 심히 징후적이다. 사회 주변부로 밀어냈던 소수자들이 좀비가 되어 체제를 공격한다는 그의 영화적 기획이 이제는 체제에 순응하는 군체로 변모되었다. 10년 전의 영화 속 좀비가 체제의 억압에 짓눌렸던 대중의 응축된 분노가 폭발한 결과였다면 지금 현재의 군체는 대중의 어떤 면모를 드러낸 것일까? <군체>에 접근하기 위해서 좀 더 깊게 숙고 해야만 할 질문이다.

▲백신을 보유한 서영철을 포박한 채 탈출구를 찾는 생존자들. ⓒ쇼박스

서영철(구교환)과 함께 군체 바이러스를 개발했던 체인스 바이오 대표는 컨퍼런스장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집단지성은 진화의 동력이다." 이 주장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집단지성이 진화의 동력이 되려면 그것이 작동하는 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피에르 레비는 집단지성을 "어디에나 분포하고, 끊임없이 가치가 부여되며, 실시간으로 조율되고, 역량의 실제적 동원으로 귀결되는 지성"으로 정의했다. 그의 주장에서 핵심은 바로 '분포'에 있다. 그에게 분포는 단순한 물리적 퍼짐이 아니라 각 개인의 고유성을 전제로 한 퍼짐이다. 피에르 레비가 꿈꿨던 집단지성은 각 개별자가 지닌 창조적 잠재력이 연결되어 서로를 인정하며 함께 풍요로워질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개념이다. 체인스 바이오 대표와 서영철이 최초 구상했던 집단지성의 힘은 피에르 레비의 개념을 통해서 분명한 진화의 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진화를 자본응축의 도구(체인스 바이오 대표)로, 사적 복수의 도구(서영철)로 갈취한다. 이로써 <군체>는 집단지성이 전체주의적 도구가 되었을 때 어떤 폭력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묘사한다.

서영철이 창조한 군체는 하나의 정보를 습득하고 공평하게 공유하여 집단적인 성장을 이뤄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별자로서의 군체들이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경험하는 정보들은 배제된다. 광고 이미지의 인간이 실제 인간이 아니라는 정보를 습득했을 때 그들은 집단적으로 진화하며 평면이 아닌 입체적 인간 유형을 찾아 헤매었다. 이후 마네킨을 실제 인간과 동일시 한 오류를 파악했을 때 그들은 정지한 인간이 아닌 움직이는 인간 유형을 다시 찾아 헤매었다. 이 과정에서 한 군체가 파악한 정보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영철이 군체의 숙주로 군림하게 된 이후, 군체가 인식하는 정보들은 오롯이 서영철의 판단 근거가 된다. 스스로 사유하지 않는 집합은 언제든 권력의 연장이 될 수 있다. 그것이 파시즘이 작동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서영철의 군림 이후 기괴한 형태로 서로의 신체를 결합하는 군체들 속에서 우리는 기관이 해체된 불완전한 물질로 전락한 인간을 목격한다. 개별 의지가 소거된 채 신체의 경계조차 사라진 몸은 사유의 주체로서 기능할 수 없다. 식욕이라는 파괴적 욕망마저 거세당한 군체들이 네트워크의 부품으로 전락한 풍경을 목격하는 것은 공포를 넘어 애도에 가까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마네킨 뒤에 숨어 냄새로 존재를 숨긴 채 군체를 관찰하는 권세정. ⓒ쇼박스

흥미롭게도 군체에 맞서는 생존자들 또한 그들 나름대로의 네트워크를 활용한다. 자신들의 정보를 군체에게 공유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하는 카카오톡 메신저, 탈출구를 파악하기 위한 CCTV 이미지. 어떤 의미에서 전자의 소통 방식은 군체의 정보 교환 방식과 사뭇 닮아 있다. 각자가 들고 있는 핸드폰은 짧은 문장들로 쪼개진 언어를 전달하고, 이로써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정보는 집단 행동의 판단 근거가 된다. 하지만 군체로 흡수된 자의 핸드폰을 통해서 모든 정보를 군체가 흡수할 때 그들의 소통 방식은 여지없이 붕괴된다. 수평적 네트워크가 진보의 시너지로 연결되는 것의 불가능성을 목도하는 순간이다. 반면 하나의 통제실을 통해서 전지적 시점의 CCTV로 대응하는 전략은 마지막 순간까지 힘을 발휘한다. 통제실이 군체에게 점령당하지 않는한 이 전략이 유용할 수 있다는 영화적 상상력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군체의 네트워크가 절대 권력에 갈취되었을 때 전체주의적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영화적 기획이 전체주의적 파놉티콘 이미지를 통해 극복된다는 사실, 전체주의적 네트워크를 전체주의적 시각으로 응대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임을 파악하는 순간 <군체>는 액션 스릴러 장르를 넘어 공포 장르로 변모한다. 이 순간이 공포인 것은 우리에게 파시즘적 폭력을 응대할 수 있는 대안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각인시킨 순간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제시하는 유일한 대안이 있다면 권세정(전지현)과 공설희(신현빈) 관계 뿐이다. 한규성(고수)을 사이에 둔 그들은 규성이 서로 인사시키려 할 때 손사레를 치며 외면했던 관계다. 전부인과 현부인이라는 그들의 어색한 위치가 서영철과 대립하는 과정 속에서 극복될 때, 서사는 완결되고 평화를 되찾는다. 원인은 그들의 위치가 가부장 질서에서 과학자 정체성으로 옮겨온 사실에 있다. 한규성이 희생되고 난 뒤 권세정은 공설희의 전화를 애써 받지 않는다. 전남편의 희생을 현부인에게 전달해야 하는 당혹감이 그들의 연결을 방해한다. 두 사람이 전화로 최초 연결되었을 때도 그들은 가부장의 상실을 충실히 애도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다. 상황의 급박함 속에서 애도는 이미 연결 전 각자가 스스로 수용한 뒤였다. 서사의 속도감을 위한 경제적 판단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속도감을 위한 서사적 경제성은 두 사람 사이에서 가부장의 위치를 축소시키며 그들의 정체성을 빠른 속도로 이동시킨다. 학생을 살리려다 희생된 한규성이 군체가 된 상태로도 단 한 번 출연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두 사람의 정체성을 보다 경제적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결정일지 모른다. 그 결과 두 사람은 CCTV로 연결되기 전 각자가 취합한 정보를 교류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결과를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권세정의 경험과 분석, 공설희의 경험과 분석은 종합되어 각자의 판단 근거가 된다. 각자가 경험했던 군체에 대한 분석의 오류는 개인의 실패로 끝나지 않고 다음 가설의 출발점이 된다. 그 가설이 공유될 때 비로소 군체를 향한 결론에 가닿는다. 누군가의 부인이 아닌 과학자로서, 판단이 주입되는 객체가 아닌 사유의 주체로서, 각자의 고유성을 유지한 채 네트워크로 연결된 두 사람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서영철과 맞서는 중요한 힘이 된다.

▲풀려난 서영철의 광기어린 모습. ⓒ쇼박스

사태가 종결된 뒤, 권세정과 공설희는 자신들에게 책임으로 남은 연구 과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파악하며 미래를 도모한다. 여전히 마음 속에 남는 대사가 있다. 공설희의 판단 착오로 혼선을 빚었던 행정가들은 통제실을 포기한 채 떠난다. 마지막까지 사태를 수습하려는 공설희에게 그들은 '책임의 문제'를 거론한다.. 만약 지금의 판단 조차 이전처럼 오류였다면, 그 책임은 오롯히 권세정과 공설희에게 떠넘겨질 상황. 물론 서사는 완결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맞서는 두 사람의 단호한 행동력에 힘을 실어주지만, 우리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부조리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너무도 많이 학습했다. 비록 군체는 진압되었더라도 정보를 독점하며 집단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들의 폭력적 야욕은 언제든 다시금 발현될 수 있다. <군체>의 서사는 두 사람을 과학자로 존중하며 그들의 행동과 판단을 지지했지만 서사가 막을 내린 뒤, 더 이상 서사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그들이 해쳐나가야 할 현실의 가혹함을 우린 잘 이해하고 있다. 이상적 이념으로 시작된 '집단 지성'의 판타지. <군체>는 그 판타지 이면의 가혹함을 우리에게 각인시키려는 기획일지 모른다.

2016년 <부산행>이 개봉하고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적 성공 이후 우리는 벌떼처럼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의 촛불을 경험했다. 두 사건 사이에 인과성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같은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이 같은 감정을 품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성을 잃은 채 식인 욕망으로 잠식된 좀비들의 재난극을 보며 공포에 떨었던 관객의 마음 속에 심겨졌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되었든, 한국 사회는 <부산행>을 기점으로 좀비 장르의 붐을 경험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좀비의 탄생을 목격한 지금, 우리는 군체를 통해서 어떤 감정을 품게 될까? 그리고 그 이후는? 영화가 스크린을 너머 현실에 와닿는 그 순간을 목도하고 싶다.

▲<군체> 메인포스터.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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