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스토리 with 키워드] 느려질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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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토리 with 키워드] 느려질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뉴스컬처 2026-05-30 12:15:45 신고

3줄요약

[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눈으로 과잉 소비되는 시대에 대한 반성은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러나 '걷고 그리니까 그곳이 보인다 – 스케치북이 이끈 길 위의 감정 연대기'는 반성을 선언에 머물지 않고, 몸의 움직임과 손의 흔적을 통해 구체적인 회복의 과정으로 풀어낸다. 이 책은 빠르게 흘러가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멈춰 서는 감각’을 복원하려는 기록이다.

저자 손혜진은 시각의 과잉이 오히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역설을 짚어낸다. 그리고 그 해법으로 ‘걷고, 그리고, 기록하는 행위’를 제시한다. 스케치북은 도구가 아니라 흐릿해진 세계를 다시 또렷하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사진=아트앤플레이
사진=아트앤플레이

KEYWORD 1 | 느린 감각

책의 출발점은 속도를 늦추는 데 있다. 여기서 ‘느림’은 이동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전체의 전환을 의미한다. 걷는 행위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관찰 방식이 된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던 풍경은 발걸음이 느려지는 순간 비로소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며, 그동안 배경으로 밀려나 있던 사물과 공간이 하나의 장면으로 떠오른다.

속도의 변화는 곧 감각의 변화로 이어진다. 눈은 더 오래 머물고, 대상의 표면뿐 아니라 결과 질감까지 받아들이게 된다. 이전에는 인식되지 않던 미세한 변화들이 감각의 층위 위로 떠오르며, 풍경은 더 이상 지나치는 이미지가 아니라 경험되는 사건으로 전환된다. 이처럼 느린 감각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자체를 다시 구성하는 출발점이 된다.

KEYWORD 2 | 스케치의 시선

책은 ‘잘 그리는 기술’보다 ‘어떻게 보느냐’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스케치는 완성도를 요구하는 결과물이 아니라,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으로 기능한다. 삐뚤어진 선과 어색한 구도는 오히려 현장의 시간성과 즉흥성을 드러내며, 그 순간의 공기와 감각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완성도를 기준으로 삼는 순간, 그림은 평가의 대상이 되지만, 그 기준을 내려놓는 순간 스케치는 경험의 기록으로 전환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정확성이 아니라 집중의 밀도다. 한 대상을 오래 바라보고 손으로 따라 그리는 과정에서, 보는 행위 자체가 변화한다. 스케치는 결국 세계를 재현하는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실천으로 자리 잡는다.

KEYWORD 3 | 도시의 재발견

정릉의 느티나무, 온수동의 예상 밖 풍경, 성남 태평동의 가파른 골목은 익숙한 도시가 얼마나 낯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화려한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를 따라가며 도시의 또 다른 층위를 드러낸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공간들이 기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관광의 시선은 대상을 소비 가능한 이미지로 환원하지만, 이 책의 시선은 그곳에 머무는 삶의 시간까지 함께 바라본다. 골목의 구조, 건물의 흔적,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척이 겹쳐지며 도시는 공간이 아니라 관계의 집합으로 재구성된다. 이 과정에서 도시는 더 이상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하고 머물러야 할 장소로 전환된다.

KEYWORD 4 | 사라짐의 기록

재개발을 앞둔 공간을 그리는 행위는 곧 사라질 존재에 대한 마지막 증언이자, 시간을 붙잡으려는 시도다. 철거를 앞둔 건물과 골목은 더 이상 일상의 일부가 아니라, 곧 사라질 풍경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띠게 된다.

그림은 이 순간을 붙잡는 매개가 된다. 눈으로 스쳐 지나가면 사라질 장면이 손을 통해 천천히 옮겨지는 동안, 풍경은 기억의 층위 속에 깊이 각인된다. 이 과정에서 장소는 개인의 경험과 감정이 축적된 기억의 일부로 재구성된다.

KEYWORD 5 | 시선에 대한 성찰

책은 ‘빈티지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는 낡음의 미학을 경계한다. 오래된 공간과 사물은 종종 감성적인 이미지로 소비되지만, 그 안에는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이 존재한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자신의 시선이 소비적 태도로 기울지 않도록 끊임없이 점검한다. 단순히 예쁘거나 감성적인 장면을 포착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공간이 지닌 맥락과 삶의 흔적을 함께 바라보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기록 행위에 윤리적 긴장을 부여하며, 관찰을 보다 깊은 이해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KEYWORD 6 | 느슨한 연결

책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만남들은 관계를 다시 정의하는 계기가 된다. 골목에서 건네받은 음식, 우연히 시작된 대화, 아무 말 없이 곁을 지키는 존재들은 모두 관계의 또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이 연결은 강한 결속이나 지속적인 의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담 없이 스쳐 지나가듯 이어지는 관계가 더 자연스럽고 지속 가능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느슨한 연결’은 관계에 대한 피로감을 줄이면서도, 타인과의 온기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점점 중요해지는 새로운 관계의 방식으로 읽힌다.

KEYWORD 7 | 몸의 회복

온수동에서의 즉흥적인 하차, 시장통에서의 스케치, 폭염 속에서도 이어지는 기록의 과정은 몸의 감각을 다시 일깨운다. 이는 취미 활동이 아니라, 효율과 속도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식적인 선택이다.

몸은 더 이상 이동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경험하는 중심으로 돌아온다. 땀, 피로, 햇빛과 같은 물리적인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면서, 삶은 보다 구체적인 감각의 층위 위에서 재구성된다.

KEYWORD 8 | 자연과의 거리

오랜 시간을 견뎌온 나무 앞에서 인간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상대화된다. 자연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보다 훨씬 길고 느리게 흐르며, 그 앞에서 개인의 고민과 감정은 다른 크기로 재배치된다.

저자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감정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자연은 삶을 바라보는 기준을 다시 설정하게 만드는 존재로 작용한다.

KEYWORD 9 | 기록의 의미

손으로 남긴 흔적은 이미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경험한 결과이며, 그 과정 자체가 기록으로 남는다. 디지털 이미지가 순간을 빠르게 소비하는 방식이라면, 아날로그 기록은 시간을 축적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기록은 기억을 붙잡고 감정을 정리하며, 자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국 기록은 외부 세계를 남기는 동시에,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 기능한다.

KEYWORD 10 | 생활로서의 감각

결국 책은 감각이 훈련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훈련은 특별한 방법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일상의 실천 속에서 이루어진다. 걷고, 바라보고, 그리고 기록하는 행위는 단순하지만 지속 가능한 방식이다.

이 반복은 점차 하나의 생활 방식으로 자리 잡으며, 삶의 리듬을 바꾼다. 감각이 변화하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지고, 결국 삶의 방향 자체가 달라진다. 이 책은 거창한 해답 대신, 작지만 지속 가능한 변화를 제시하며 그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걷고 그리니까 그곳이 보인다'는 빠른 시대에 대한 저항이자, 느린 감각의 회복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책은 세계를 다시 보는 방법을 설명하기보다, 그 방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몸의 차원에서 드러낸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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