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금·심문 과정 성폭력 사례 적시…이스라엘 "관계 단절" 반발
작년 전세계 분쟁지 성폭력, 확인된 것만 1만건 육박…전년대비 배증
(뉴욕=연합뉴스) 김연숙 특파원 = 유엔이 분쟁 지역에서 성폭력을 자행했거나 이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국가·무장단체 명단에 이스라엘군과 러시아군을 처음으로 추가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9일(현지시간)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 제출한 '분쟁 관련 성폭력'(CRSV) 연례 보고서 부록에서 이스라엘 무장·보안군과 러시아 무장·보안군을 공식 명시했다.
이 부록은 '안보리 의제에 상정된 무력 충돌 상황에서 성폭행 또는 기타 형태의 성폭력을 자행했거나 이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신뢰할 만한 근거에 따라 의심되는 당사자 목록'을 명시한 것으로, 외신들은 통상 '블랙리스트'라 부른다. 올해 명단에는 국가 및 비국가 주체 총 77곳이 이름을 올렸다.
보고서는 분쟁지역 21개국에서 국가 및 비국가 주체에 발생한 성폭행, 성노예, 강제결혼, 인신매매 등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이스라엘군과 러시아군이 구금 시설과 점령지 등에서 자행한 성범죄 실태도 고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유엔은 2023∼2025년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 출신 팔레스타인인 31명을 상대로 한 집단 성폭행, 고문 등 성 학대 행위를 확인했다. 성기를 표적으로 한 총격, 강제 나체화, 성폭행 협박 등의 행위도 있었다.
가해자로는 이스라엘군, 교도관, 특수경찰 대테러 부대원들이 포함됐다.
피해자 다수는 성인 남성과 소년들이었으며, 구금 및 심문 과정에서 성폭력이 고문의 한 형태로 사용된 정황이 확인됐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유엔은 성폭력에 대한 '체계적인 책임 부재'가 면책 문화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고 지적하며, 이스라엘 남부 군 구금시설에서 발생한 팔레스타인 수감자 집단 성폭행 사건을 언급했다.
당시 이스라엘 군인들이 방패로 가린 채 가자 출신 수감자를 성폭행하는 장면이 보안 카메라에 그대로 녹화됐고, 이를 발견한 이스라엘 의료진이 군·경찰에 신고하면서 그 실태가 폭로됐다.
당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성폭력 피의자들을 두둔하고 이들을 처벌하려는 수사당국을 비판한 바 있다.
러시아군 역시 우크라이나 내 점령 지역에서 310명에 성폭행, 전기 충격, 생식기 훼손 등의 학대를 한 사례들을 확인했다.
피해 생존자의 절반 이상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반복적인 성폭행에 노출된 것으로 조사됐다.
유엔 측은 이스라엘과 러시아 당국이 국제 조사관들의 현장 접근을 제한하고 방해했음에도, 이 같은 구체적인 인권 침해 사례가 검증됐다고 밝혔다.
CRSV 보고서에 성폭행 책임 주체로 명시된다고 해서 제재와 같은 구체적인 불이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성폭력 책임 주체로 지목됐다는 점에서 외교적·도덕적 평판 훼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특히 이번 조치는 유엔이 해당 국가들을 전세계에 공개적으로 비난해 수치심을 주는 '네이밍 앤 셰이밍'(Naming and Shaming) 전략의 일환이다. 또 반복해서 이름이 올라갈 경우 유엔 평화유지 활동(PKO) 참여가 금지되는 등 국제무대에서 입지가 크게 좁아지는 실질적인 불이익이 따를 수 있다.
두 국가는 작년 보고서에서도 언급되긴 했지만, '성폭행 및 기타 형태의 성폭력 행위를 저지르거나 이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신뢰할 만한 근거로 의심되는 당사자' 명단에 추가될 수 있음을 '사전 경고'(on notice) 하는 수준에 그쳤다.
양국은 강력 반발했다.
대니 다논 주유엔 이스라엘 대사는 전날 엑스(X·옛 트위터)에 "정치적인 결정"이자 "사실 및 현실과는 동떨어진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보고서에 반발해 구테흐스 사무총장 측과 관계를 단절할 것이라고도 밝혔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임기는 올해까지다.
마이크 왈츠 주유엔 미국 대사도 X에서 "조사를 수행하고 범죄자에게 책임을 묻는 강력한 법치 시스템을 갖춘 민주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을, 하마스와 같은 테러조직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유엔으로서 터무니없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하마스는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명단에 올라 있다.
바실리 네벤자 주유엔 러시아 대사는 "이러한 주장들은 근거없는 거짓말이며, 늘 그렇듯 러시아를 악당으로 묘사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서한을 구테흐스 사무총장에게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보고서는 2025년 전세계 분쟁 지역에서 검증된 성폭력 사건은 총 9천788건으로, 전년도에 비해 2배 이상 급증했다고 밝혔다.
보고서 작성자인 프라밀라 파텐 유엔 분쟁지역 성폭력 담당 특별대표는 "매우 우려스러운 추세"라며 이 같은 수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전체 피해자의 90∼95%는 여성과 소녀였으나, 구금시설 등을 중심으로 남성과 소년들을 겨냥한 성적 고문 행위가 눈에 띄게 증가한 점이 이번 보고서의 특징이다.
noma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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