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이집트)=한민광 작가] 요즘 카이로의 한낮은 숨이 턱 막힐 만큼 뜨겁다. 사막의 열기를 피해 조금은 색다른 바람을 쐬고 싶어 외곽에 새로 생긴 디스트릭트 5 몰(District 5 Mall)로 향했다. 거대한 현대식 쇼핑몰 한편에서 열리고 있는 ‘비욘드 반 고흐(Beyond Van Gogh)’ 행사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번 전시는 액자에 걸린 실제 작품을 감상하는 일반적인 미술관이 아니다. 사방의 거대한 벽면과 아득한 바닥을 온통 스크린으로 채우고, 대형 영상과 음악을 통해 공간 전체를 연출한 미디어아트 행사다.
‘실제 그림이 아닌 디지털 스크린이 과연 와닿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어두운 방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거대한 사방의 빛이 일렁이며 온몸을 감싸 안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림을 구경하는 것을 넘어, 빛이 만들어 낸 기묘한 공간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듯한 색다른 경험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어둠 속 푸르게 빛나는 거대한 Welcome 포토존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푸른 밤하늘 이미지를 배경으로 선명한 흰색 글씨의 ‘BEYOND Van Gogh’ 타이틀이 은은한 하단 조명 위 떠올라 있다. 메인 홀로 들어가기 전, 관람객들이 줄을 지어 기념사진을 남기는 이 첫 공간은 앞으로 마주할 방 안의 분위기를 직관적으로 예고하는 듯했다. 차가운 도심의 쇼핑몰 내부에서 갑자기 몽환적인 푸른 빛의 경계로 진입하는 듯한 기분을 주며, 복잡했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게 한다.
포토존을 지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차분한 가벽들과 대형 배너들이 늘어선 소개 공간이 이어진다. 파란색 스크린 위에는 'TWO BROTHERS'라는 제목과 함께 고흐와 동생 테오의 이야기가 영문 텍스트로 적혀 있고, 그 뒤로 화려한 꽃 그림 배너들이 웅장하게 늘어서 있다.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이 걸음을 멈추고 텍스트를 읽거나 가만히 서서 공간을 둘러보는 모습이 눈에 띈다. 화려한 미디어아트 영상이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전, 띄엄띄엄 배치된 대형 배너와 시각 자료들을 통해 관람객은 반 고흐라는 예술가를 만나고 있다.
좁은 통로를 지나 마침내 마주한 메인 홀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규모다. 바닥부터 높은 천장까지 사방의 벽면이 일제히 빛을 발하며 거대한 그림 종이로 변모한다. 신기한 것은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영상인데도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형 스크린 위로 붓 터치가 느껴지고, 마치 방금 막 칠해진 물감이 마르지 않은 듯한 착각을 준다. 메인 홀 가운데 마련된 의자에 앉아 사방에서 밀려오는 색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공간과 나 사이의 경계가 서서히 흐려지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시간이 흐르면서 커다란 스크린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로 바뀐다. 수많은 인물의 얼굴이 벽면 가득 채워질 때는 공간 전체에 묘한 엄숙함과 긴장감이 감돈다. 거대한 스크린 속 인물들의 눈동자가 사방에서 관람객들을 정면으로 내려다보고, 관람객들은 그 거대한 시선들에 인사한다. 영상 속 인물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먹먹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빔프로젝터’가 쏘아 올린 거대한 빛들은 이처럼 인물의 감정을 아주 커다랗게 확장하여 공간 속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미디어아트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정형화된 관람 틀을 깨고 공간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벽면에서 시작된 색채의 움직임은 가만히 멈춰있지 않고 바닥으로 흘러내려 와 관람객들의 발밑에까지 잔잔히 넘실거린다. 노란색과 푸른색의 커다란 스크린 앞에 서서 벽면을 배경으로 조용히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관람객 자신도 이 거대한 공간 연출의 일부가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시각적인 자극과 함께 홀을 빈틈없이 채우는 음악은 복잡한 카이로 일상의 번잡함을 잊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전시의 흐름이 절정에 달하면 짙푸른 밤하늘과 황금빛 명작들의 이미지가 사방을 세차게 휘감는다. 벽면 가득 부서지는 노란 가스등의 불빛과 거친 꽃잎들이 화면 위에서 피어나고 지기를 역동적으로 반복한다. 이 순간 홀 안의 모든 관객은 더욱 숨을 죽인다. 어떤 이들은 거대한 스크린 벽면에 몸을 기대어 가만히 빛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또 어떤 이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을 둘러싼 색채의 심연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어두운 방 안을 가득 채운 황금빛 영상들은 저마다의 지친 일상을 안고 이곳을 찾은 카이로의 관객들에게 말 없는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있다.
카이로의 Distric 5 Mall에서 만난 이번 행사는 현대의 기술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다독일 수 있는지를 소박하게 보여준 시간이었다. 진짜 화가의 그림이 주는 엄숙함도 좋지만, 거대한 화면을 통해 색채를 온몸으로 감각하는 경험은 색다른 환기였다. 화가는 아주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아름다운 빛의 조각들은 새로운 날개를 달고 여전히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위로하고 있다. 전시장을 나선 후 카이로의 밤하늘이 평소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 보았던 황금빛 별들과 뜨거운 노란 색채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온기로 남아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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