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소리를 줄이는 일이 아니다. 국립민속국악원의 기악단 기획공연 ‘지금 비우다 "여(餘) 유(YOU)”’는 국악기 하나하나의 숨을 가까이 들려준다. ‘나를 위한 쉼, 국악명상’ 프로그램에서 출발했다. 명상음악과 힐링음악을 새로 제작해 전통악기의 음색, 호흡, 잔향을 창작 기악 공연으로 풀어낸다.
공연 제목 ‘여(餘) 유(YOU)’에는 비움 뒤 남는 여분의 시간, 관객 자신을 향한 회복의 뜻이 겹쳐 있다. 마음속에 쌓인 감정과 생각을 덜어내고, 빈자리에 삶의 여유를 다시 채우자는 의미다. 프로그램도 감정의 파동, 울림, 기억, 귀환, 침묵, 가능성, 삶의 길, 즐거움의 회복 순서로 짜였다.
첫 곡 ‘여진: 파동의 힘’은 한승석·오영빈 공동 작곡이다. 지나간 순간이 남긴 감정의 떨림과 여운을 다룬다. 절제된 선율과 깊은 호흡 속에서 그리움이 천천히 번지고, 피리의 울림은 비어 있는 공간에 남은 작은 떨림을 표현한다. 공연 전체의 문을 여는 곡답게, 강한 시작보다 조용한 내면의 흔들림을 앞세운다. ‘여파: 울림의 확장’은 이아람의 작품이다. 어떤 순간이 지난 뒤에도 마음에 남아 있는 감정의 울림을 음악으로 옮긴다. 대금과 해금의 선율, 25현가야금의 반복적 움직임이 파동처럼 퍼진다. 공명이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 작은 울림을 붙든다. 앞선 ‘여진’이 감정의 첫 떨림이라면, ‘여파’는 감정이 몸 밖으로 번지는 과정에 가깝다.
유민희 작곡 ‘여운: 그 아이 이름일랑 청이라고 불러주오’는 심청전 속 곽씨부인의 마지막 유언에서 착안한 작품이다. 끝까지 아이를 품으려는 어머니의 사랑과 기억을 담아낸다. 반복되는 흔들림과 잔잔한 울림은 품에서 사라지지 않는 모성의 여운을 떠올리게 한다. ‘여정: 만리조선 나갔던 흥보제비’ 역시 유민희가 작곡했다. 판소리 흥보가의 ‘제비노정기’에서 착안한 곡이다. 흥보제비가 강남을 거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긴 길을 음악으로 그린다. 높이 날아오르고 다시 방향을 잡는 제비의 움직임은 삶의 여정과 희망의 귀환을 상징한다.
김교민 작곡 ‘여백: 비움의 시간’은 성음과 트라이앵글의 고요한 울림 위에 해금의 정선아리랑 선율을 얹는다. 공허와 여백의 미를 다룬 작품으로, 비움과 침묵, 누군가의 부재까지 하나의 여백으로 품는다. 소리가 많지 않은 순간에도 음악이 이어지는 방식을 보여주는 곡이다. 이아람의 ‘여명: 가능성의 공간’은 바쁜 일상 속 잠시 멈춰 서는 순간을 음악으로 옮긴다. 대금과 피리의 부드러운 선율, 25현가야금의 잔향, 대아쟁의 깊은 울림이 어우러지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든다.
한승석·오영빈 공동 작곡 ‘여로: 인생 그리고 다시’는 멈추지 않고 앞날로 향하는 마음을 담는다. 은은하게 퍼지는 선율 속에 지나온 사람과 기억, 다시 피어나는 희망의 울림이 스며 있다. 비움 이후 남는 감정이 과거에 갇히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장면을 음악으로 제시한다. 마지막 곡 ‘여흥: 즐거움의 회복’은 김교민의 작품이다. 흥타령에서 출발해 한국 흥과 어우러지는 감정을 표현한다. 구슬픈 원곡 선율에 경쾌한 리듬과 화성을 더해 한의 승화를 담고, 중모리장단과 태평소가 새 흥을 밀어 올린다. 공연의 끝은 조용한 위로보다 되찾은 생기와 즐거움으로 닫힌다.
25현가야금, 거문고, 아쟁, 대금, 소금, 피리, 해금, 양금, 타악 등 전통악기 각각의 소리가 가까이 드러난다. 큰 합주가 주는 악기의 호흡, 여운을 세밀하게 느끼도록 설계된 무대다. 연기와 무용도 가세해 음악의 감정을 장면으로 확장한다. 출연진은 국립민속국악원 기악단을 중심으로 창극단, 무용단, 객원 연주자가 참여한다. 공연감독은 유수정 예술감독이 맡았고, 총 21명이 무대에 오른다. 연주, 성음, 움직임이 한 자리에서 만나 국악이 품은 여백의 정서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국립민속국악원 관계자는 “국악의 쉼과 치유 가능성을 기악단 창작 무대로 확장한 자리”라며 “명상 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 더 많은 국민이 국악을 가까이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지금 비우다 “여(餘) 유(YOU)”’는 내달 12일~13일 국립민속국악원 예원당에서 열린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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