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폐지 후 170여년만…상원 표결 남아
식민지 노예제 배상 문제 공론화 가능성
(파리=연합뉴스) 송진원 특파원 = 프랑스 하원이 28일(현지시간) 과거 프랑스 식민지 노예제의 법적 근거였던 '흑인 법전' 폐지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AFP 통신에 따르면 프랑스 하원은 이날 17∼18세기 프랑스 왕정 시절 식민지 노예제의 법적 토대 역할을 했던 흑인 법전 폐지안을 가결했다. 상원 표결까지 통과하면 흑인 법전은 공식 폐기된다.
흑인 법전은 루이 14세 치세를 비롯한 프랑스 왕정 시절 제정된 법령으로, 식민지 노예의 법적 지위를 규정한 문서다.
이 법전은 노예를 상속 가능한 '동산'으로 규정했으며, 도주한 노예의 귀를 자르는 등 잔혹한 처벌 조항도 담고 있다. 또 노예의 자녀 역시 부모와 같은 신분을 물려받도록 했고, 모든 노예는 가톨릭 신자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프랑스는 영국과 포르투갈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노예무역 국가였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17∼19세기 프랑스 항구를 출발한 선박들은 아프리카에서 100만 명이 넘는 남녀와 어린이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 강제로 실어 날랐으며, 이들 상당수는 카리브해 식민지 농장으로 보내졌다.
프랑스는 프랑스혁명 이후인 1794년 처음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02년 카리브해 과들루프에 군대를 보내 노예제를 부활시켰다.
프랑스에서 노예제가 최종 폐지된 것은 1848년이다.
프랑스는 2001년 세계 최초로 노예제와 노예무역을 반인도적 범죄로 인정한 이른바 '토비라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정작 흑인 법전 자체는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폐지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21일 토비라법 제정 25주년 기념 연설에서 흑인 법전의 공식 폐지를 제안했다.
이날 하원 토론에서는 감정적인 발언도 이어졌다.
녹색당 소속 스티비 구스타브 의원은 이번 표결이 자신에게 매우 개인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옛 식민지이자 현재 해외 영토인 마르티니크 출신 아버지를 둔 그는 "증조할머니를 떠올린다. 그분의 할머니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336번 노예'가 됐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 "우리는 노예의 후손이 아니다. 자유롭게 태어났다가 노예로 전락한 인간들의 후손"이라고 강조했다.
마르티니크 출신 인권운동가 디우돈 부트랭은 흑인 법전 폐지는 너무 늦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흑인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며 "이제는 상징적 조치를 넘어 실질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역사 교육과 인종차별 대응 프로젝트에 더 많은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번 흑인 법전 폐지 움직임을 계기로 프랑스의 식민지 노예제 배상 문제도 다시 공개적으로 논의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21일 "어떻게 이런 범죄를 배상할 수 있을까. 이는 결코 회피해서는 안 될 질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이 문제에 대해 허황한 약속을 해서도 안 된다"며 직접적인 배상 문제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프랑스의 식민지 배상 문제와 관련해 가장 자주 언급되는 국가는 카리브해의 빈국 아이티다.
아이티는 1804년 노예들이 프랑스인 주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끝에 미주 최초의 독립 흑인 국가가 됐다.
그러나 프랑스는 1825년 아이티 독립을 인정하는 대가로 옛 프랑스 노예 소유주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며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아이티는 이를 갚기 위해 프랑스 은행들로부터 고금리 대출을 받아야 했고, 결국 1952년에야 이른바 '이중 부채'를 모두 상환할 수 있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해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프랑스와 아이티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공동위원회 설치를 발표했다.
그는 위원회에 1825년 프랑스가 아이티에 강요한 배상금의 역사적 영향을 조사하고, 양국 관계 개선 방안을 마련해 정부에 권고안을 제출해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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