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초급·중급 한국어' 이어 시리즈 완결 '실전 한국어' 펴내
"사실·허구의 경계 흐리는 것이 오토픽션 본질이자 묘미"
"교실 안 서사 이론과 교실 바깥 진짜 삶 대비…인생은 실전"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2019년 여름, 데뷔 10년 차 소설가 문지혁은 삶이라는 사각 링의 코너에 몰린 심정이었다.
몇 권의 책을 냈으나 반응은 신통치 않은 문단의 '무명소졸'인 데다가 신춘문예나 주요 문학상을 통해 등단하지 않은 이른바 '무면허 작가'였기 때문.
"내 인생은 왜 늘 이 모양일까. 이 거지 같은 소설 쓰기도 이게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는 독서실에 틀어박혀 자기 인생을 소설로 써 내려갔다. 소설이라기보다는 '한풀이'였다.
그렇게 열하루 만에 200자 원고지 500매 분량이 완성됐고, 원고를 민음사에 투고했다.
다행히도 눈 밝은 편집자는 이를 허투루 보지 않았다. 이듬해 원고는 '초급 한국어'라는 제목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문지혁의 시그니처가 된 이른바 '한국어' 시리즈의 출발점이었다.
처음 책이 나왔을 땐 작가 자신도 별 기대는 없었다. 제목 탓인지, 책은 엉뚱하게 서점의 학습지 코너에 꽂혀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초급 한국어'는 입소문을 타며 조용한 반향을 일으켰고, 호응에 힘입어 그는 2023년 후속편인 '중급 한국어'를 출간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리즈 완결판인 '실전 한국어'를 펴낸 문지혁 작가를 지난 27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 "'초급 한국어'로 작가로서 제2의 데뷔한 셈…시리즈 완결 후련"
'초급 한국어'를 낸 지 6년이 흘렀고, 그 사이 문지혁은 문단의 말석을 벗어나 오토픽션(자전소설)이라는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작가가 됐다.
일단 '한국어' 시리즈를 3부작으로 마무리하게 된 소감부터 물었다.
문 작가는 "후련하다"면서도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마음"이라고 운을 뗐다. 그만큼 '한국어' 시리즈는 그에게 각별했다.
그는 "소설을 그만두려고 썼던 소설이, 소설을 계속 쓰게 해주는 아이러니한 작품이 됐다"며 처음 '초급 한국어'를 쓰게 된 배경을 돌아봤다.
이어 "제가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하기 시작한 첫 번째 소설이 '초급 한국어'였다"며 "데뷔 10년 만에 제2의 데뷔를 한 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어' 시리즈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오토픽션이다. 자서전(autobiography)에 소설(fiction)을 결합한 장르를 말한다.
전작에 이어 '실전 한국어'의 주인공 역시 문지혁이다. 소설 속 문지혁은 K대학 전임 교수 임용에 지원하지만 탈락을 맛본다. 대신 구청이 운영하는 스토리텔링 수업을 맡게 되며 벌어지는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소설로 그려냈다.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누구나 품는 질문이 있다. 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일까.
그러나 작품에서 실제 작가 문지혁과 주인공 문지혁을 말끔하게 분리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문 작가는 되레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일부러 흐리고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오토픽션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사실과 허구의 혼합 비율이 '영업비밀'이라며 입을 꾹 닫았던 작가는 이번 시리즈를 완결하며 그 비밀을 어느 정도 풀었다.
초급에서 실제 작가와 주인공의 싱크로율(일치율)이 80%였다면, 중급에서 50%, 실전에서 30%로 낮아졌다는 것.
그는 "초급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냈다면, 중급부터는 '재현의 윤리'를 더 고민하게 되면서 조금씩 허구를 더 많이 내세우는 방식으로 변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소설 속 현실과 실제 현실은 '평행우주' 관계를 이룬다.
처음 초급 한국어에선 두 개의 우주가 거의 포개진 상태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미묘하게 어긋난 상태로 작품이 흘러가게 됐고, 이제는 그 버성김이 작품의 묘미가 됐다.
문 작가는 "평행우주에서 주인공 문지혁의 시간은 실제의 시간과는 다르게 흐른다"며 "소설 속 문지혁은 자신에게 맞는 미래를 찾아나가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허구가 더 가미됐다"고 부연했다.
◇ '한국어' 시리즈는 완결됐지만…'오토픽션 세계관'은 계속 확장
'실전 한국어'에서도 주인공 문지혁의 삶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대학의 정규직이라는 안정적 직업도, 소설가로서 인정이나 성취도 그에겐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일로 먹고 살지만, 자기 인생은 어쩌지도 못하는 신세.
스토리텔링 수업을 듣던 중 막걸리를 꺼내서 마시는 나이 지긋한 수강생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는 강사로서 자존감을 지키기도 버겁다.
하지만 작가는 쉽게 낙담하지 않는다. 무릎이 꺾일만한 상황에서도 깨알 같은 웃음이 쉼 없이 터져 나온다.
작가는 "무료한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 유머"라며 "유머가 있으면 그 어떤 것도 사실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한국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왜 '고급'이 아니라 '실전'인지도 물었다.
인생에 '고급'이란 없거니와 무엇보다 "인생은 실전"이기 때문이란 답이 돌아왔다.
그는 또 "교실에서 가르치는 서사 이론과, 이론처럼 돌아가지 않는 교실 바깥의 진짜 삶을 대비시키고 싶었다"며 "그 괴리를 해결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삶과 이야기가 얼마만큼 떨어져 있거나 혹은 붙어 있는지를 한번 가늠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의 인생에도 우리가 삶의 진실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있다"며 "평범함 속에 있는 비범함을 찾아내려 한 결과물이 '한국어' 시리즈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3부작을 끝으로 '한국어' 시리즈는 완결이 됐지만, 작가는 또 다른 작품을 통해 자신의 오토픽션 세계관을 이어갈 계획이다.
문 작가는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소재로 한 소설을 준비하고 있다며 "오토픽션과 디아스포라(이산)가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를 탐구해 보려 한다"고 귀띔했다. 또 자신의 군대 시절을 오토픽션 형태로 쓴 작품도 선보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kih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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