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짠내를 싣고 골목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날, 경북 동해안 끝자락에는 시간이 한 세기쯤 천천히 흐르는 마을이 있다. 경주 감포 해국 길은 빛바랜 담벼락과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100년 전 어촌 마을의 형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다.
1920년대 개항 이후 일본인 어부들이 건너와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이 동네는, 한국관광공사가 추천한 감포 해안 코스의 중심지로 꼽히며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약 600m 길이의 짧은 거리 안에 옛 역사의 흔적과 동해의 시원한 풍경이 겹겹이 쌓여 있어 도보 여행지로 제격이다.
개항기 어촌의 역사적 배경
이 산책로는 도보 여행 코스인 '감포깍지길 4구간'의 알짜배기 구역이다. 동해 바다를 곁에 두고 길게 이어지는 골목길은 과거 일본인 어민들이 정착하며 만들어진 동네 구조를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당시 일제는 감포항을 어업 전진기지로 삼았고, 이에 따라 수많은 일본인 건축물이 들어섰다. 광복 이후 우리 정부가 회수한 일본인 소유의 재산이라는 뜻을 가진 옛 일본식 주택들이 마을 군데군데 남아 당시의 고단했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머리를 맞춘 듯한 낮은 처마와 촘촘하게 맞닿은 골목 배치는 일제강점기 어촌의 공간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거리가 워낙 좁아 이웃 간의 숨소리까지 들릴 듯한 이 구조는, 외지인의 침입을 막고 어민들이 긴밀하게 소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된 형태다. 걸음마다 살아있는 역사를 몸소 체험하게 만드는 이 길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교육 공간의 역할도 도맡고 있다.
해국 계단과 골목길 거점 공간
전체 구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소는 단연 ‘해국 계단’이다. 거친 바닷바람을 견디며 보랏빛 해국 꽃이 무리 지어 피어나는 이 돌계단은, 몇 해 전 대중에게 방영된 드라마 ‘조립식 가족’의 촬영지로 입소문을 타며 기념사진을 남기는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회색빛 시멘트 계단 위에 그려진 화사한 해국 그림은 자칫 어두워 보일 수 있는 옛 골목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계단 꼭대기에는 테이블을 단 하나만 두고 손으로 직접 내린 커피를 파는 작은 가게가 있어,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쉬어가기 좋다. 골목 안쪽에는 100년 역사를 품은 옛 목욕탕 건물을 안팎으로 고쳐 만든 테마 카페 '1925 감포'도 방문객을 맞이한다. 과거 마을 주민들의 사랑방이었던 우물과 탕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둔 채, 개항기 감포의 옛 모습을 실내 인테리어로 재해석해 지루할 틈 없이 동선이 이어진다.
송대말등대로 이어지는 해안 정취
해국 길 산책을 끝낸 뒤에는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송대말등대까지 발길을 넓히는 방문객이 많다. ‘소나무가 펼쳐진 끝자락’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곳은 200년이 넘은 해송 숲이 바닷가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형태다. 거친 파도와 암초가 많아 예로부터 선박 사고가 잦았던 이 해역을 지키기 위해, 지난 1955년 무인 등대로 첫 불을 밝혔다.
이후 2001년에는 인근 문무대왕릉의 정신을 이어받아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모양을 본뜬 새 등대를 나란히 세웠다. 현재 옛 등대 건물 내부는 빛과 영상을 접목한 미디어아트 체험전시관으로 꾸며져 있어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인기가 높다. 아기자기하고 아늑한 골목 정취와는 또 다른, 가슴이 뻥 뚫리는 동해의 거대한 수평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이다.
Copyright ⓒ 위키푸디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