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외환시장과 채권시장, 원자재시장의 숫자들은 27일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세계 자금이 다시 미국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신호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22일 장중 1520원을 넘어섰다. 원화 가치는 한 달 새 2.59%, 1년 기준으로는 11.3% 떨어졌다.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는 1년 만의 최고 수준 부근까지 치솟았다. 눈에 띄는 건 안전자산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금마저 힘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현물 금 가격은 온스당 4556달러까지 밀리며 지난 5일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내려앉았고, 일주일 만에 3% 넘게 하락했다. 지난 2월 시작된 중동 전쟁이 에너지 가격과 글로벌 물가 불안을 자극했지만, 시장이 선택한 피난처는 금이 아니라 달러와 미국 국채였다. 불안이 커질수록 세계 금융시장은 다시 미국의 금리와 달러 유동성 중심으로 수렴하고 있다
▲달러 패권보다 더 중요한 건 ‘안전자산 미국’의 흔들림
겉으로 드러난 시장만 보면 ‘달러 패권의 균열’ 같은 말은 좀처럼 실감 나지 않는다. 자금은 다시 달러로 몰리고 있고, 미국 국채는 여전히 세계 금융시장의 최종 피난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불과 닷새 전인 지난 22일, 국제통화기금(IMF)은 정반대의 문제의식을 담은 팟캐스트 ‘달러 대안으로 떠오른 통화들(Currencies that Shine)’을 공개했다. 배리 아이켄그린(Barry Eichengreen) UC버클리 경제학 교수와 치마 심슨-벨(Cheima Simpson-Bell) IMF 이코노미스트는 이 방송에서 세계 중앙은행들이 달러 의존도를 줄이며 금과 비전통 통화로 외환보유고를 분산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핵심은 국제통화기금(IMF)이 말한 ‘균열’이 오늘의 환율 수준 자체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배리 아이켄그린 UC버클리 경제학 교수와 세르칸 아르슬라날프가 지난해 11월 미국 전미경제연구소(NBER)에 제출한 워킹페이퍼(w34478)가 그 배경이다. 이들이 주목한 건 달러 가치의 등락이 아니었다. 위기 때 미국 국채가 여전히 세계 금융시장의 ‘보험’ 역할을 하느냐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 보험은 지금이 아니라, 정확히 13개월 전 한 차례 흔들린 적이 있었다..
먼저 통념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보유액 통화구성(COFER) 자료를 보면 달러 비중은 2000년대 초 70%대에서 지난해 2분기 60% 아래까지 내려왔다. 숫자만 보면 달러 패권이 빠르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배리 아이켄그린 교수와 공저자들의 결론은 시장의 공포와는 달랐다. 달러 비중 하락은 지난 25년 동안 점진적으로 이어진 흐름일 뿐, 최근 들어 이탈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금융제재 강화나 안전자산 지위 약화가 탈달러화를 촉진했다는 주장도 통계적으로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달러 비중의 완만한 하락은 미국 경제의 상대적 축소를 반영한 결과에 가깝다. 미국의 세계 국내총생산(GDP) 비중은 2000년 30% 수준에서 지난해 약 26%로 내려왔고, 구매력 기준으로는 20%에서 15%까지 낮아졌다. 경제 비중 변화에 따라 기축통화 비중이 조정되는 건 체제 붕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가깝다. 대부분의 논의는 여기서 멈춘다. 아이켄그린은 한 걸음 더 들어갔다.
▲보험 역할 멈춘 미 국채
그는 같은 워킹페이퍼에서 스테이블코인이나 브릭스(BRICS) 공동통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결제망 ‘mBridge’가 단기적으로 달러 중심의 준비자산 구조를 흔들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봤다. 다만 예외 하나를 남겼다. 미국 국채가 위기 때 더 이상 안전자산으로 신뢰받지 못하는 순간, 그 충격은 국제 통화·금융 시스템 전체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침식은 실제로 한 차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지난해 4월이다. 미국이 한 세기 만의 고율 관세를 꺼내 들고 중국·캐나다·유럽연합(EU)이 보복 조치에 나서자 시장은 흔들렸다. 문제는 흔들린 방식이었다. 주가는 급락했고 달러는 약세를 보였다. 여기에 더해 미국 국채 금리까지 뛰어올랐다. 30년물 국채 금리는 지난해 5월 말 5.2%까지 치솟으며 2008년 금융위기 직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 조합은 시장에서 거의 금기에 가까운 움직임이다. 통상 위기가 오면 자금은 미국 국채로 몰린다. 주가가 빠질수록 국채 가격은 오르고 금리는 내려간다. 달러는 강세를 보인다. 미국 국채는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사실상 보험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지난해 4월에는 주가와 달러, 국채 가격이 함께 흔들렸다. 안전자산이 더 이상 안전판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비랄 아차리아 뉴욕대 교수 등의 미국 전미경제연구소(NBER) 분석(w34640)은 이 변화를 숫자로 풀어냈다. 미국 국채 금리는 무위험 금리와 신용 스프레드, 그리고 ‘편의수익(convenience yield)’으로 구성된다. 편의수익은 국채가 안전하고 유동성이 높으며 담보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낮은 금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얻으려는 프리미엄이다. 장기 국채의 편의수익은 통상 10~40bp(1bp=0.01%포인트) 수준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지난해 4월, 미국 국채의 헤지 기능이 흔들리면서 약 12bp의 편의수익이 증발했다. 미국이 안전자산 발행국이라는 지위 덕분에 누려왔던 보이지 않는 이익이 약해졌다는 의미다.
더 미묘한 변화도 나타났다. 평소 2년물과 10년물 국채의 편의수익 차이는 2bp 안팎에 머문다. 그러나 지난해 4월에는 2년물이 10년물보다 7bp 높게 형성됐다. 투자자들이 단기 국채의 안전성은 인정하면서도, 장기 국채에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시장은 미국 국채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니었다. 다만 ‘먼 미래의 미국’을 이전만큼 확신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중앙은행은 왜 다시 금을 사들이기 시작했나
이 지점에서 다시 금이 등장한다. 비랄 아차리아 교수 등의 분석은 자금 흐름이 장기 국채에서 단기 국채와 금으로 이동했다고 해석했다. 금은 이자를 주지 않고 결제 효율도 떨어진다. 그런데도 중앙은행들이 금을 사들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미국 금융 시스템 밖에 존재하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오늘의 역설도 풀린다. 최근 금값 하락은 달러 체제의 균열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난 2월 중동 전쟁 이후 글로벌 자산 가격이 함께 흔들리면서 투자자들이 다른 자산의 손실을 메우기 위해 금까지 현금화한 영향이 컸다. 단기 가격은 전쟁과 유동성 압박에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중앙은행들의 구조적 금 매입 흐름은 꺾이지 않았다. 지금의 달러 강세는 균열이 없다는 신호라기보다, 불안 속에서 자금이 다시 미국으로 몰려드는 전시(戰時)의 피난 흐름에 가깝다.
다만 여기서 통념을 한 번 더 걷어낼 필요가 있다. ‘중앙은행들이 달러를 팔아 금을 샀다’는 단순한 그림은 실제 데이터와 다르다. 아이켄그린 등의 분석에 따르면 선진국 준비자산에서 금 비중은 2021~2024년 17%에서 25%로 높아졌다. 그러나 같은 기간 금값이 약 50% 급등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중 확대의 상당 부분은 신규 매입보다 가격 상승 효과에 가까웠다.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금을 공격적으로 사들였다기보다, 오른 금을 팔지 않았다.
반면 신흥국은 달랐다. 이들은 실제로 금 매입을 늘렸다. 배경에는 러시아 사태가 있었다. 미국과 유럽은 2014년 크림반도 병합과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의 달러 자산을 동결했지만, 러시아 본토 금고 안의 금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이후 중앙은행들의 시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2023년 인베스코 조사에서는 응답 중앙은행의 60%가 러시아 자산 동결 조치를 계기로 금의 매력이 커졌다고 답했다. 금을 자국 안에 보관하려는 움직임도 강화됐다. 러시아와 중국은 자국 금 보유분 전량을 국내에 보관한다고 선언했다. 미국 국채가 절대적으로 안전한 자산이라기보다, 미국의 정치·외교 질서 안에서 안전한 자산일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위안화 빠진 자리에 원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시선은 한국으로 향한다. 국제통화기금(IMF) 분석에서 더 중요한 대목도 여기다. 달러 비중이 줄어든 자리를 유로화나 위안화가 가져간 게 아니었다. 호주달러와 캐나다달러, 그리고 한국 원화 같은 비전통 준비통화들이 그 빈틈을 메웠다. 아이켄그린 등의 워킹페이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위안화 비중이 오히려 낮아졌고, 그 점유율 일부를 싱가포르달러와 한국 원화가 가져갔다고 분석했다.
이 문장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다. 원화는 단순히 여러 비전통 통화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 게 아니다. 위안화가 잃은 공간 일부를 실제로 흡수한 통화로 지목됐다. 중국에서 빠져나온 자금의 일부가 한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안보 질서와 중국 경제권 사이에서 성장해 온 한국에는 기회이면서도 동시에 부담이 되는 변화다.
그 배경에는 더 깊은 구조가 있다. 아이켄그린 등의 분석은 준비통화 선택이 단순한 무역 규모나 금리 차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봤다. 군사동맹과 외교 질서가 외환보유액 구성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1960년대 서독과 일본이 달러 가치 하락 우려 속에서도 달러 자산을 유지했던 배경에는 미군 주둔이 있었고, 1970년대 사우디아라비아가 오일달러를 미국 국채에 재투자한 것도 미국의 군사 보호와 연결돼 있었다고 분석했다.
한국과 일본도 현재형 사례로 제시됐다. 두 나라 중앙은행은 무역과 금융 구조만으로 설명되는 수준보다 더 큰 비중으로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맹의 구조가 외환보유액 구성에도 반영돼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위치는 독특하다. 한국은 자국 외환보유액을 달러 중심으로 유지하는 대표적 동맹국인 동시에, 다른 나라들이 중국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원화 자산으로 일부 자금을 옮기는 대상국이기도 하다. 한국으로 들어오는 돈의 논리와, 한국이 보유한 돈의 논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달러 균열 충격 이제 원화로 향한다
문제는 이 비대칭 구조가 위기 국면에서 어떻게 움직이느냐다. 한국은 미국처럼 기축통화를 발행하는 나라가 아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수출 비중이 크며, 금융시장은 외국인 자금 흐름에 민감하다. 원화가 국제 분산투자 자산으로 편입될수록 평시에는 자금 유입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반대로 불안이 커지면 그 돈은 더 빠르고 거칠게 빠져나간다. 지금 시장이 보여주는 장면이 그렇다. 중동 전쟁 이후 달러 강세가 이어지면서 원화 가치는 1년 새 11% 넘게 밀렸다. 평시에 한국으로 들어왔던 글로벌 자금이 위기 국면에서 다시 달러로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시장의 시선은 이제 익일 열리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로 향한다. 금융시장에서는 기준금리 연 2.50% 동결 전망이 우세하다. 환율이 1500원대를 넘어선 상황에서 금리를 낮추면 원화 약세와 자금 유출 압력이 커질 수 있다. 반대로 금리를 유지하거나 올리면 내수와 부동산 시장 부담이 커진다. 원화가 비전통 준비통화로 자리 잡을수록 한국은행의 운신 폭은 더 좁아진다. 세계 자금이 원화를 분산투자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한국의 통화정책은 국내 경기만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단계에 들어섰다.
국제통화기금(IMF) 팟캐스트의 핵심은 ‘달러 패권 붕괴’ 선언이 아니다. 지금 시장이 보여주듯 세계는 여전히 달러를 가장 안전한 피난처로 찾고 있다. 다만 예전처럼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지도 않기 시작했다. 미국 국채가 안전자산 역할을 한 차례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지난해 4월의 충격이 시장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원화는 이제 그 균열의 바깥에 서 있는 통화가 아니다. 달러 체제의 균열과 불안이 실제 가격으로 반영되는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그 첫 번째 시험대가 익일 열리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다.국제통화기금(IMF) 팟캐스트가 던진 메시지는 ‘달러 패권 붕괴’ 선언과는 거리가 있다. 지금 시장이 보여주듯 세계 자금은 여전히 위기 때마다 달러로 향한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도 분명해졌다. 미국 국채가 지난해 4월 한 차례 안전자산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기억이 시장에 남아 있다는 점이다. 달러는 아직 대체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무조건 신뢰받는 자산도 아니라는 의미다.
그리고 한국 원화는 이제 이 변화의 바깥에 있는 통화가 아니다. 달러 체제의 균열과 불안이 실제 가격으로 반영되는 중심부에 들어와 있다. 그 첫 번째 시험대가 익일 열리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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