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기면서 도성 방비를 위해 성곽을 쌓고 동서남북에 4개의 큰 성문을 세웠다. 동대문(흥인지문), 서대문(돈의문), 남대문(숭례문), 북대문(숙정문)으로 이뤄진 4대문의 사이사이에는 작은 관문인 4소문을 두었다. 북쪽의 창의문, 남쪽의 광희문, 동쪽의 혜화문, 서쪽의 소의문이 그것인데, 소의문은 백성들 사이에서 서(西)소문으로 불렸다.
서소문은 마포나루를 통해 전라, 경상, 충청 삼남지방의 곡식과 생필품이 집결돼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사람과 물자가 분주히 오가는 이 공간을 조정은 국법의 준엄함을 보여주려고 공개 처형장으로 삼았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수많은 이들의 피와 비명이 이어지고 그들의 잘린 목이 거리에 내걸렸다.
정조 사후 천주교 박해가 본격화되면서는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처형장으로 사용되며 공포를 더했다. 한국인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과 다산 정약용의 친형 정약종,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서소문이 한국 가톨릭의 대표적 순교 성지가 된 연유다.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광화문 시복식에 앞서 가장 먼저 서소문 성지를 찾아 참배했다.
서소문에는 저항의 역사가 있다. 임오년에 고종의 중전 민씨(명성황후)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장병들이 군란을 일으켰다가 이곳에서 처형됐다.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지도자 김개남은 전주에서 처형됐지만, 조정의 조치로 잘린 시신이 옮겨져 전시됐다.
구한말 들어 서소문의 운명은 또 바뀐다. 일제가 서울역을 중심으로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이 일대가 철도 시설 용지로 수용돼 고립된 것이다. 일제는 결국 1914년 서울 도시정비 계획을 추진하면서 서소문을 인근 성곽과 함께 철거했다. 성 바깥쪽 처형장은 1927년 철로 안에 수산물 시장이 개설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산업화 시대 서울의 팽창으로 서소문은 도심 교통의 요지가 됐다. 서울역과 시청을 잇는 길에 차량이 몰리자 정부는 1966년 경의선 철로 위에 약 0.5㎞ 길이의 고가도로를 놓았다. 처형장이었던 자리 위로 콘크리트 구조물이 도시의 동맥처럼 얹힌 셈이다.
그 고가차도 철거 현장에서 붕괴 사고가 나 3명이 목숨을 잃고 3명이 다쳤다. 신앙을 지키려던 순교자들, 부패한 권력에 맞섰던 임오년 병사들과 동학도들의 자리 위에서다. 늘 이렇듯 민초들의 역사 뒤에는 평범한 이들의 기억되지 않는 희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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