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송정 정자<왼쪽>와 정자 앞에서 바라본 식장산. 은어송정 정자는 대전시 동구 가오근린공원 정상부에 위치해있다. 사진=한소민 소장
조선 시대는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였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주어진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위로받고 숨통을 틔우곤 했습니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과 희망이 이야기 속에서는 가능했으니까요. 은어송과 통매바위 전설은 바로 그러한 신분 상승의 기적이 담긴 서사입니다.
옛날 가오동에 은어송이라는 젊은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머슴살이를 하며 매일 식장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며 고산사의 스님과 친해지게 되었지요. 은어송은 점심 때가 되면 고산사로 찾아와 자신의 소박한 음식을 스님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3년 동안 이어진 한결같은 정성에 감복한 스님은 마침내 당대발복(當代發福)의 명당을 점지해 주었고, 은어송은 그곳으로 아버지의 묘를 이장했지요. 이후 신기한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낮에는 소도둑이 버리고 간 소를 얻었고, 밤에는 역적으로 몰려 도망치던 대갓집 딸이 찾아와 헛간 잠을 자청하며 머무르게 된 것입니다. 이튿날 여인은 금과 은으로 된 패물을 내놓으며 성공할 때까지 도울테니 학문에만 전념하라고 권유하며 지도해주었습니다. 은어송은 그런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 뒤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도 올랐습니다. 훗날 장인의 누명까지 벗겨 주었고, 평생 관직에 있다가 늙어서는 고향으로 돌아와 평온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남성판 신데렐라나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은어송을 이끄는 아내의 역할은 지혜의 여신 아테나(Athena)를 연상시키지요.
고산사 대웅전<왼쪽>과 고산사 범종각. 고산사는 대전시 동구 대성동 식장산 서쪽 골짜기에 위치해있으며 대전시 지정 유형문화재 10호로 지정됐다. 신라시대 말기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 전해오지만,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사진=한소민 소장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지혜와 전략의 신으로, 단순한 힘이 아닌 이성과 통찰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오디세우스 같은 영웅 곁에서 스스로 사고하고 성장하도록 돕는 멘토였지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 속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에게 붙잡히기도 하고, 세이렌의 유혹과 거대한 바다 괴물의 위협을 견뎌야 했지요. 하지만 그는 무모한 힘 대신 아테나의 조언 속에서 지혜와 인내로 위기를 극복해 나갔습니다. 특히 오디세우스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왕국은 왕비를 차지하려는 무례한 구혼자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아테나의 전략에 따라 초라한 노인의 모습으로 변장해 적들을 탐색하고 때를 기다린 끝에 다시 왕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테나가 준비된 영웅인 오디세우스 앞에 나타났듯 대갓집 딸 역시 3년간 덕을 쌓은 은어송 앞에 등장했습니다. 결국 은어송이 이뤄낸 신분 상승은 베풂을 통해 얻은 명당이라는 외적 조건과 지혜로운 조력자의 인도 아래 스스로 치열하게 노력한 내적 조건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기적이었지요.
통매바위공원 표지석<왼쪽>과 통매바위어린이공원 모습. 대전시 대덕구 오정동에 위치해있다. 사진=한소민 소장
또 다른 신분상승 서사인 통매바위 전설은 홍수라는 혼란 속에서 운명이 바뀌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오정동에 성실하고도 우직한 머슴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십 년이 넘도록 오르지 않는 품삯을 받으면서도 변함없는 의리로 주인을 섬겼고, 받은 돈은 큰 바위 밑에 숨겨둔 항아리에 모아 두었지요. 어느 날, 큰 홍수가 나서 주인집은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때 머슴은 절망에 빠져있는 주인에게 바위 밑에 묻어둔 엽전을 꺼내 집을 짓는데 쓰라며 내놓았지요. 이에 감동한 주인은 그를 사위로 삼게 되었고, 훗날 사람들은 머슴이 돈 단지를 통매(끈)로 묶어 묻어 둔 바위라 하여 그 바위를 통매바위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가오동의 은어송과 오정동의 머슴은 모두 신분제 사회에서는 보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명당과 지혜로운 조력자, 그리고 대홍수의 혼돈 속에서 기적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물론 그 기적은 나눔과 의리를 지키며 성실히 살아낸 두 젊은이의 태도가 불러온 것이었겠지요.
오늘날 도로며 학교, 아파트 이름 곳곳에 '은어송'이 붙여져 있고, 통매바위 역시 공원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입에 오르내리는 그 이름들은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젊은이를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저마다의 버거운 현실을 견디며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언젠가는 기적이 찾아와 주겠지요?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한소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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