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은빈은 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서늘한 사이코패스로 긴장감을 만들다가도, 어느 순간 우당탕탕 사고를 치는 천방지축 캐릭터로 웃음을 안긴다. 이상하게도 그의 연기에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있다. ‘원더풀스’ 속 은채니 역시 그렇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고뭉치지만, 보고 있으면 어느새 “저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박은빈은 그렇게 또 하나의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은빈은 노란색 비니에 밝은 하늘색 바탕의 체크 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셔츠 곳곳에는 노란 포인트가 더해져 있었는데, 자유분방하고 통통 튀는 원더풀스 속 은채니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났다.
박은빈은 “초심을 되찾고 생각을 신선하게 꺼내 오려고 은채니스러운 모습으로 왔다”며 “처음 대본 리딩했을 때 입었던 옷을 다시 찾아 입고 왔다.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 15일 공개된 ‘원더풀스’는 1999년 말, 우연히 초능력을 가지게 된 해성시 4인방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평범했던 이들이 각자의 능력을 얻게 된 뒤 마을의 평화를 위협하는 빌런들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다. 박은빈은 극중 갑작스럽게 순간이동 초능력을 갖게 되는 은채니 역을 맡았다.
박은빈은 캐릭터를 연구할 때마다 자신만의 ‘캐릭터 노트’를 작성한다. 이날도 동화책 같은 작은 수첩을 직접 들고 인터뷰장에 나타났다. 수첩을 펼친 그는 은채니를 분석하며 적어둔 문장들을 하나씩 읊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느낌. 세상 눈치 안 보고, 곧 죽을 수도 있으니 할 말은 다 해야 하고. 다소 괴팍한데 더 확실한 자아가 세 보이는 인물. 본인의 관심 밖이면 무심한 느낌. 무신경하고 퉁명스러워 보이는 모습으로 개차반 같은 모습. 자신만의 흐름을 공고히 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
직접 적은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박은빈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뽀짝한 캐릭터 노트를 썼어요. 항상 들어가는 내용은 다 달라요. 역할마다 접근 방식도 다르고요. 은채니는 아무래도 만화적인 부분이 있는 캐릭터라 저만의 시그니처처럼 떠오를 수 있는 연기 톤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채니의 특성들을 계속 적어봤죠.”
그는 캐릭터의 성격을 구축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은채니만의 몸짓과 제스처까지 새롭게 연구했다. 초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등장하는 시그니처 포즈에도 직접 아이디어를 더했다. 손가락으로 ‘락앤롤’ 모양을 만든 뒤 머리에 가져다대는 독특한 제스처다.
“히어로적인 제스처가 하나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두 손가락만 머리에 대는 포즈를 해봤는데 뭔가 조금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채니한테 더 어울리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죠. 제가 느낀 채니는 락앤롤이나 펑크스타일을 좋아했을 것 같은 인물이었어요. 세기말 감성도 덧붙여봤고요.”
은채니는 순간이동 초능력을 가진 인물인 만큼 연기 과정에서도 쉽지 않은 지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장면과 장면이 빠르게 이어져야 하는 캐릭터 특성상 긴 촬영 기간 속 감정과 움직임의 연결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박은빈은 “작품 자체가 프로덕션 기간이 길었다”며 “순간이동을 하는 캐릭터라 찰나에 움직여야 하는데, 실제 촬영은 몇 달 뒤에 이어서 찍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화면이 전환돼도 티가 나지 않게 저 스스로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했다”며 “움직임의 속도감이나 감정의 결이 끊기지 않도록 계속 신경 썼다”고 설명했다.
“안 달아본 액션 장치가 없을 정도였어요. 부위별로 다 해봤던 것 같아요. 촬영하면서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매달 수 있구나’ 싶더라고요. 와이어 자체보다도 하네스라고 하는 보조 장치를 계속 착용하고 있어야 했던 게 제일 힘들었어요. 몸을 굉장히 꽉 조이고 있어야 하거든요.”
‘원더풀스’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함께했던 스태프들과 다시 호흡을 맞춘 작품이기도 했다. 박은빈은 익숙한 제작진과의 작업 덕분에 현장에서 안정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특히 유인식 감독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도 드러냈다. 그는 “정말 존경하는 감독님이다. 인간적으로도 너무 좋은 분”이라고 말했다.
“전작에서는 작품의 방향성이나 배우로서의 고민 같은 이야기들을 정말 많이 나눴어요. 그런데 이제는 작품 이야기를 넘어서, 인간적인 어른에게 물음을 청하고 싶을 때도 감독님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저한테 참 좋은 어른이 생겼다는 마음이 들어요”
박은빈은 ‘원더풀스’ 시즌2 가능성에 대해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많이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어 “정말 디테일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 작품”이라며 “애정을 가지고 여러 번 봐주신다면 처음에는 안 보였던 디테일들을 발견해 나가는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의 복잡함을 잠시라도 잊고 싶은 분들이 봐주시면 좋겠어요. 모지리들에게 정이 가는 순간부터는 ‘원더풀스’의 매력에 빠지실 거예요. 조금만 애정 어린 눈으로 이들을 지켜봐 주신다면 마지막에는 뭉클함도 남고, 그 시대의 향수 같은 감정도 함께 남지 않을까 싶어요.”
박은빈은 어느덧 매 작품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배우가 됐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장르와 캐릭터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이어온 흔적이 선명하다. 이에 대해 박은빈은 “다양한 제안을 많이 보내주셔서 일단 운이 좋았다”며 “그때그때 마음이 끌리는 작품을 선택해 오다 보니까 그렇게 느껴질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저 스스로는 거창한 도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냥 한 번 시도해 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뭐가 더 어울리고, 어떤 걸 더 잘하는 사람인지 계속 찾아가고 있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그게 누군가의 취향에 맞는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고, 만약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또 다른 기회를 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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