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병원, 뇌전증 환자 혈액 내 'T세포' 수용체 서열 분석
(서울=연합뉴스) 김잔디 기자 = 장시간 걸리는 뇌파 검사나 고가의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없이 피를 뽑아 면역세포를 분석하는 것만으로 뇌전증을 진단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주건·이상건 교수와 중환자의학과 신용원 교수, 입원의학센터 홍상빈 교수 공동 연구팀은 뇌전증 환자와 일반인 총 100명의 혈액을 채취해 분석한 결과,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26일 밝혔다.
뇌전증은 뇌 신경망의 비정상적 활동으로 경련과 발작이 반복되는 신경 질환이다. 그동안 주로 뇌 자체 문제로만 여겨졌으나 최근에는 전신 면역 체계 이상이 발병에 깊이 관여한다는 사실이 하나둘 밝혀지고 있다.
이에 연구팀은 우리 몸의 방어군 역할을 하는 면역세포인 'T세포'에 주목했다. 혈액 속 T세포 표면에는 체내 침입한 적을 식별할 수 있는 고유한 유전자 서열 구조인 수용체(TCR)가 있는데, 이는 마치 상품마다 각기 다른 정보를 담고 있는 바코드와 같다는 이유로 '면역 바코드'로 불린다.
평소 건강한 사람의 피에는 다양한 적에 대비하기 위한 수많은 종류의 면역 바코드가 골고루 존재한다. 몸속에 특정 병원균이 침입해 이를 인식한 맞춤형 T세포가 집중해 증식하면, 한정된 혈액 안에서 전체 면역 바코드의 가짓수와 다양성은 오히려 줄어든다. 이를 면역학적으로 클론 확장(Clonal expansion) 현상이라고 부른다.
연구팀은 뇌전증이 전신적인 면역 체계의 활성화를 동반하는 질환이라면, 환자의 혈액 속에서 특정한 면역 바코드만 비정상적으로 증식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검증에 들어갔다.
뇌전증 환자 45명과 건강한 일반인 대조군 55명 등 총 100명의 말초혈액을 채취한 뒤 T세포 수용체의 유전적 구성을 분석했다.
그 결과 뇌전증 환자군은 건강한 대조군에 비해 전반적인 면역 바코드의 다양성이 현저히 낮았다.
특히 약물이 듣지 않는 난치성 환자나 신경염증을 동반한 뇌전증 환자일수록 특정 면역 바코드만 집중적으로 증식하는 현상이 더욱 뚜렷했다.
뇌전증이 단순 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신 면역 체계가 불균형해진 상태라는 사실을 시사한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연구팀은 T세포 수용체 분석 결과를 토대로 뇌전증 진단과 중증도를 감별할 수 있는 인공지능(AI) 모델을 개발했다. 이 모델은 혈액 분석 데이터만으로 뇌전증 환자와 건강한 일반인을 평균 80%의 높은 정확도로 감별해 냈다.
주건 교수는 "뇌전증은 그동안 뇌 자체 문제로만 인식됐으나 이번 연구는 전신 면역 시스템의 관점에서 질환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며 "환자 개개인의 면역 상태에 기반한 정밀 의료를 실현하는 데 한 발짝 더 다가섰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인 '임상 및 중개 신경학 연보'(Annals of Clinical and Translational Neurology)' 최근호에 게재됐다.
jand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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