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주문진항 인근 언덕에는 강원 해안에서 가장 먼저 불을 밝힌 등대가 서 있다. 1918년 세워진 뒤 한 세기 넘게 동해를 오가는 선박의 길잡이 역할을 해온 곳이다. 바다를 향한 불빛 속에 강원 해양 교통사와 근대 등대 건축의 흔적이 함께 남아 있다.
주문진 등대 / 한국관광공사(촬영 : 김지호)
강원 해안의 첫 근대식 항로 표지
강원 중부 해안은 지형상 대형 선박이 드나들기 좋은 항구가 발달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조업과 해상 물류 기반이 남부·서부 해안권보다 늦게 갖춰지면서, 선박의 입출항을 돕는 등대 설치도 상대적으로 늦어졌다.
인공 신호 체계가 부족했던 시기에는 해상 사고 위험이 늘 따랐다. 암초나 수심 변화, 항구 접근 방향을 알려줄 항로 표지가 필요했고, 연안을 오가는 선박이 늘면서 등대 건립 요구도 커졌다. 동해안의 해상로가 생활과 물류의 통로로 쓰이는 동안, 육지의 위치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불빛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지리적 한계로 항만 발달이 늦었던 지역에서 등대의 등장은 해상 활동의 기반을 다지는 일이기도 했다. 불빛 하나가 항로를 정리하고, 선박이 육지와의 거리를 가늠하게 하는 기준이 됐기 때문이다.
주문진 등대 / 한국관광공사(촬영 : 김지호)
이 같은 배경 속에서 1918년 강원 권역 최초의 항로 표지 시설이 세워졌다. 강원 해안에 근대식 등대 체계가 도입된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첫 불을 밝힌 뒤 이 등대는 근현대사의 변화 속에서도 기능을 이어 왔고, 현재 강원특별자치도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로 남아 있다.
이곳의 가치는 건립 시기만으로 볼 수 없다. 동해안 연안에서 최초로 선표지국을 운영한 등대라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선표지국은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에 무선 전파나 특정 신호를 보내 선위 측정을 돕고 항로 유지를 보조하는 시설이다.
주문진 등대 / 한국관광공사(촬영 : 김지호)
레이더나 위성 항법 장치가 널리 쓰이기 전, 선표지국은 연안 항해의 정확도를 높이는 바탕이 됐다. 영동 지역을 오가는 어선과 상선의 안전한 조업 및 항해 환경을 뒷받침했다. 강원 중부 연안에 처음 들어선 이 항로 표지는 해양 신호 체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현장으로 남아 있다. 바다 위에서 방향을 잡아야 했던 선박들에 이곳의 불빛과 신호는 주문진 해역을 인식하는 확실한 기준점이었다.
흰 벽돌 등탑이 간직한 근대 건축 양식
이 등대는 건축적으로도 초기 근대 등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전체 구조는 백원형연와조 방식으로 지어졌다. 흰색 원형 벽돌조 구조를 뜻하는 이 양식은 당시 등대 건축의 기술과 형태를 보여주는 유용한 자료다.
등탑의 높이는 하부 기단부터 상부 등실까지 10m이며, 몸체의 최대 직경은 3m다. 원통형으로 솟은 구조는 해풍과 진동을 견디는 데 유리한 형태이며, 곧게 올라간 선은 당시 시공 방식의 정밀함을 증명한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기능에 맞춰 압축된 구조와 균형 잡힌 비례를 이룬다.
주문진 등대 / 한국관광공사(촬영 : 김지호)
외벽에는 백색 석회 몰타르가 칠해져 있다. 흰색 마감은 동해의 바다색과 대비되어 멀리서도 등대의 위치를 쉽게 식별하도록 돕는다. 동시에 염분을 머금은 해풍이 벽돌 내부로 스며드는 것을 막는 기능도 한다. 등대가 바다와 맞닿은 환경에서 오랜 시간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마감 방식이 자리한다.
벽돌을 쌓은 뒤 석회 반죽을 입히는 방식은 우리나라 초기 등대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법이다. 기계화된 대량 시공이 자리 잡기 전, 수공업적 시공과 근대적 설계가 결합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린 구조는 당시의 재료 사용과 시공 과정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처럼 근대식 등대의 초기 형태와 시공 방식을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보존한 사례는 흔하지 않다.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자연환경을 견디며 남아 있는 벽돌식 등탑은 당시 토목·건축 기술을 보여주는 실물 자료다. 해풍과 염분, 기후 변화가 이어지는 해안 환경에서 형태를 유지해 왔다는 점도 이 등대의 보존 가치를 높인다.
이 등대는 역사성과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대문화유산 제12호로 지정됐다. 지정 이후에는 초기 양식과 구조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되고 있다. 현장을 찾으면 근대 항로 표지 시설의 기능뿐 아니라 보존된 건축 유산의 형태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하얀 등탑과 원형 벽돌조 구조는 등대가 지닌 실용성과 시대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바닷가 언덕 위에 세워진 원형 등탑은 주변 풍경 속에서 과하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순간 선명하게 존재를 알린다.
15초마다 바다로 향하는 불빛
등대의 본래 역할은 바다 위 선박에 위치와 방향을 알려주는 일이다. 상부에 설치된 등명기는 밤이나 기상 악화로 시야가 제한될 때 육지의 위치와 항구 접근 방향을 알리는 시각적 지표가 된다.
주문진 등대 / 한국학중앙연구원-공공누리
이곳의 불빛은 15초에 한 번씩 섬광을 낸다. 이 고유한 발광 주기는 주변 등대나 다른 선박의 불빛과 구별되는 신호가 되며, 항해사는 이를 통해 주문진 해역의 위치를 정확히 식별할 수 있다. 여러 불빛이 뒤섞이는 밤바다 위에서 등대마다 차별화된 주기는 유용한 판별 요소다. 첨단 항해 장비가 발전한 오늘날에도 등대의 주기적 섬광은 선박이 위치를 재확인하는 보조 수단으로 쓰인다.
불빛의 도달 범위도 넓다. 대기 상태가 정상적일 때 등탑에서 나간 불빛은 최대 37㎞ 거리에서도 관측된다. 이 거리는 연안 조업선뿐 아니라 먼바다를 지나는 대형 선박이 동부 해안선의 위치를 확인하고 항로를 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바다에서 육지의 윤곽을 확인하기 어려운 시간대에는 이 신호가 항해 판단의 근거가 된다.
폭풍우나 해무 등으로 항해 조건이 나빠질 때도 등대의 신호는 선박에 중요한 지침이 된다. 과거의 아날로그 장비에서 현대의 광원 체계로 내부 시스템은 변화했지만, 바다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역할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 세기를 넘긴 시설이 여전히 현역 항로 표지로 기능한다는 점은 이곳의 역사적 상징성을 더한다.
주문진 등대 해양문화공간 / 한국학중앙연구원-공공누리
한국전쟁 상흔을 딛고 다시 켜진 불빛
등대의 역사에는 한국전쟁의 흔적도 남아 있다. 1950년 전쟁 발발 당시 동해안 일대 역시 군사 작전과 포격의 영향권에 들었다. 해안 고지와 항만 시설은 주요 요충지였기에, 이 과정에서 등탑과 주변 관리 시설도 큰 피해를 보았다.
당시 벽돌식 등탑은 포격과 교전으로 외벽의 석회 몰타르가 떨어져 나가고 구조 일부가 무너지는 등 건립 이후 가장 큰 위기를 겪었다. 바다를 비추던 항로 표지 시설도 전쟁의 피해를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해상 보급로 확보와 연안 항해 재개는 전시에도 시급한 과제였다. 이에 따라 휴전 협정 체결 전, 전쟁이 계속되던 1951년에 복구공사가 단행되었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복구가 우선 진행된 사실은 이 등대가 지닌 교통적·군사적 중요성을 뒷받침한다.
1951년 복구는 외형적 수리를 포함해 강원 최초 등대의 역사적 맥락을 이어가는 재건이었다. 참화를 딛고 다시 세워진 등탑은 복구 이후 현재까지 동해 해상에서 항로 표지 기능을 변함없이 수행하고 있으며, 이는 지역 해양 교통의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였다.
주문진항과 함께 둘러보기 좋은 동선
이 등대는 주문진항과 가깝다. 주문진항 중심부나 선착장에서 경사로와 보행로를 따라 약 10~15분 걸으면 등대가 있는 언덕 정상부에 닿는다. 항구와 어시장을 둘러본 뒤 도보로 연계하기 좋은 거리여서 이동 부담이 크지 않다. 활기찬 항만의 풍경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면 등대와 동해 수평선이 조화롭게 펼쳐진다. 등대 자체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1918년 건립된 오래된 항로 표지라는 배경을 알고 찾으면 건축물의 형태와 주변 바다 풍경이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주문진 등대 전경 / 한국관광공사(촬영 : 김지호)
야외 공간 개방 시간은 하절기와 동절기 구분 없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계절별 운영 시간 차이가 없어 일정을 계획하기 수월하며, 이 시간 동안 등탑 외관과 바다 전망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입장료는 없으며 주차 시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별도 휴관일 없이 연중무휴로 운영돼 주말과 공휴일에도 방문이 가능하다. 이곳의 가치는 화려한 볼거리보다 오랜 세월이 주는 무게감에 있다. 1918년 세워진 등대는 전쟁과 복구, 기술 변화를 거쳐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바다를 향해 불을 밝힌다. 주문진항과 가까운 위치, 한 세기 넘게 이어진 역사, 15초마다 바다로 향하는 불빛이 이 등대를 강원 동해안의 오래된 항로 표지로 기억하게 하는 핵심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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